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푸양시(안후이성)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푸양 중국 묘.jpg|width=760]] 여음후 하후조의 무덤 [[춘추전국시대]] 호나라 (胡)가 있었으나 기원전 495년 [[초나라]]에게 정복되었다. 진한대에는 저우커우에 여양현 (汝陽縣)이 있었던 것처럼 푸양에는 여음현 (汝陰縣)이 설치되었고, 둘다 여남군에 속하였다. 비록 군의 치소는 현 [[주마뎬]] 쪽에 있었지만, 여음현 역시 도위가 설치될 정도로 중시되었다. [[제환공]]의 재상이자 [[관포지교]] 일화로 유명한 [[관중]]이 이곳 출신이고, [[전한]]의 개국공신 [[하후영]]이 여음후로 봉해진바 있다. 그의 아들이자 2대 여음후인 하후조의 무덤이 1977년 잉저우구의 공항 확장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삼국지]]의 [[여몽]] 또한 여음 서남쪽의 부판현 (현 푸난현) 사람이며. 222년 [[위문제]]는 여음현을 중심으로 여음군을 신설하였다. [[서진]] 시기에는 [[사마의]]의 6남 [[사마준]]이 여음왕으로 봉해져 [[손오]]와 맞섰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 재차 독자적인 군이 된 여음은 남조와 북조의 경계 지역이었는데, 5세기부터 남조의 지배력이 미쳤다. 한때 주민들이 옮겨졌던 합비는 남여음군이 되었다. [[수나라]] 시기 영주(潁州)가 설치되었고, 이는 1912년까지 유지되었다. 현재의 잉저우구 지명으로 남아있다. [[당나라]] 대인 9세기에는 활정절도사 (滑鄭節度使)령이었다. 송대에는 순창부 (順昌府)가 설치되었고, 1072년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구양수]]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원나라]] 말엽인 1351년에는 영주 출신의 [[한산동]]이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이자 [[송휘종]]의 후손임을 칭함으로써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었다. 명대의 봉양부를 거쳐 청대에는 영주부에 속하였다. 청대인 1735년 현 지명인 부양으로 개칭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