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풋볼 (문단 편집) === 럭비의 체계화 === 1870년 12월 4일, 리치몬드의 에드윈 애쉬(Edwin Ash)와 블랙히스의 벤자민 번스(Benjamin Burns)는 [[더 타임스|타임스]]에 "럭비 클럽들마다 조금씩 다른 규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럭비 형태의 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연습 코드를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한다."라고 제안하는 편지를 실었고, 결국 1871년 1월 26일, 런던의 Pall Mall 레스토랑에서 열린 회의에서 21개 클럽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럭비 풋볼 클럽들은 [[럭비 풋볼 유니온]]을 결성하게 되었다. 같은 해 '''1871년 3월 27일'''에는 [[에든버러]]에 있는 래번 플레이스(Raeburn Place)에서 '''세계 최초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국제 럭비 경기가 치러졌으며,''' 다음 해인 1872년에는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럭비 팀이 '''최초의 대학 대항전([[https://www.youtube.com/watch?v=DYWGjMSA0Dg|The Varsity Match]])'''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1883년'''에는 영국의 구성국들인 4개의 '''홈 네이션스(Home Nations)'''에 해당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가[* 이 시절엔 [[아일랜드섬]] 전체가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구분 없이 아일랜드 자체가 영국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서로 으르렁대 단일팀으로는 절대 출전하지 않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축구와 달리 럭비나 [[크리켓]]에선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럭비와 크리켓이라는 매개체로 단합해 아일랜드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여담으로 유독 럭비 경기 시에만 아일랜드는 친영(?)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북아일랜드와 단일팀을 이루는 크리켓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크리켓엔 영국 구성국 전체가 단합해서 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게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럭비에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랄지, Autumn Nations Cup, [[British & lrish Lions Tour]]처럼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단합하거나, 아일랜드 단일팀과 영국이 서로 경쟁하거나 아니면 British & Irish Lions Tour에서처럼 영국과 아일랜드 단일팀이 아예 한 팀을 꾸려(!) 다른 국가대표팀들과 대결하는 등 이렇게 나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영국 간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대회가 많다. 가령 매년 치러지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나 Autumn Nations Cup에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단일팀을 이루어 시합에 나서며, British & Irish Lions Tour에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영국과 아일랜드의 혼합 팀(!)이 4년마다 남반구의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를 순회 공연하며 저 팀들과 맞붙는다. 이런 대회들 때마다 아일랜드인과 북아일랜드인, 그리고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의 그간의 케케묵은 감정의 골이 누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아무튼 럭비가 큰 일을 하고 있다.] 매년 서로 경쟁하는 국제 럭비 대회인 '''Home Nations Championship'''이 처음으로 열렸고, 1910년 프랑스가 합세하면서 '''파이브 네이션스 챔피언십''', 2000년에 이탈리아가 합세하면서 오늘날의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 되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럭비 경기는 1880년까지도 축구(Association Football)보다 줄잡아 두 배나 많은 선수들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그것도 잉글랜드 남부의 젠틀맨 팀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북부의 노동자 클럽에서도 그러했다고 한다. 가령 [[맨체스터]]와 [[리버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럭비만 했었다. 1866년에도 FA 회원은 겨우 10개 클럽에 불과했다. 문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종목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핵심은 [[아마추어#s-1.1|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적용이었다. 19세기 유럽 신사 사회에서 스포츠는 순수하게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를 숭상했고 돈을 받고 뛰는 [[프로페셔널#s-2]]은 하층민이나 하는 매우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럭비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철두철미한 고수는 내부 분열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대다수 선수들이 중·상류층이라 굳이 럭비를 통해 임금을 받지 않아도 되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 럭비 클럽들과 달리, 북부 지역 럭비 클럽 선수들은 대부분이 공장에서 일하지 못하고 럭비 경기를 뛴 시간만큼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생계가 유지되는 노동자 계층들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럭비 선수들은 손실된 소득을 보상받기 위해 '브로큰 타임(Broken time)'에[* 평소 다른 업무에 종사하던 아마추어 선수가 국제 대회나 기타 경기 대회에 참가한 기간 중의 보수나 수당 지급이 중단된 시간을 말한다.] 대한 지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에 반발한 잉글랜드 북부 럭비 클럽들은 1895년,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히 고수하던 럭비 풋볼 유니온에서 나와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Northern Rugby Football Union, NRFU)'''을 결성하였고, 이것이 럭비 리그의 시초다. 비록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NRFU)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규칙을 수정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조직 모두 처음에는 '''같은 규칙'''으로 경기를 치렀었다. 그리고 노던 럭비 풋볼 유니온은 1922년 '''럭비 풋볼 리그(Rugby Football League, RFL)'''로 해당 단체의 이름을 바꾸었다. 분단되기 전까지 '럭비 풋볼(Rugby Football)'이라고 알려져있던 [[럭비 유니온]]은 분단으로 인해 럭비 리그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럭비 유니온(Rugby Unio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도 럭비 유니온은 1995년 이전까지 엄격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해왔지만[* 1900년도 초반에 잉글랜드 럭비 풋볼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럭비인으로는 최초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던 조지 힐 경은 럭비의 아마추어리즘을 외쳤다. 그는“나는 프로페셔널리즘에 굴복하느니, 럭비 협회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며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럭비 협회는 그들이 다른 스포츠에 결핍돼있는 순결함의 상징인 아마추어리즘을 유지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100년 가까이 아마추어로 남았다.], 결국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1995년에 비로소 완전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럭비 유니온이 인기가 많고 보편화되어 있지만, 럭비 유니온이 인기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럭비 리그도 같이 활성화돼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럭비라고 부르는 스포츠는 럭비 유니온이고, 럭비 리그는 럭비 리그 혹은 간단히 리그라고 부른다. 하지만, 두 코드의 스포츠는 전세계 대부분에서 간단히 "'''럭비'''"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