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납토성 (문단 편집) === 위례성의 위치 비정 === 첫째로 풍납토성은 기존의 [[위례성]] = [[몽촌토성]]이라는 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 이전까지 풍납토성은 그리 중요한 성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풍납토성이 주목을 받았을 때 한 [[일본]]학자가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했으나 묻혀버렸다. 이후 1960년대 [[서울대]] 고고학부의 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그저 몽촌토성을 방위하는 사성(蛇城)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 학설은 [[이병도]]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이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이병도]]는 풍납토성의 풍납(風納)이 우리말로 바람들이 혹은 바람드리라고 했고 이것은 사성의 사(蛇)가 배암([[뱀]]의 옛말)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풍납토성은 [[한강]]과 너무 가까워 홍수 시 침수될 우려가 너무나도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이 한 번 쓸린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평지성이었기 때문에 방어면에서도 불리한 점이 많았다. [[고구려]]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의 [[경주 월성]]도 평지성이라기보다는 산성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면 월성은 평지성이다. 하지만 강으로 둘러싸인 남측은 전혀 접근이 안 되고, 북쪽은 야트막한 언덕이 급경사를 이루며 서있다. 따라서 평지성이긴 하되 산성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이래저래 따져 보아도 왕성으로서의 자격 요건이 참 애매했던 성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그렇게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의 정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왕성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데, 규모는 너무 크니까.''' 바로 이 의문이 풀린 게 1997년이었다. 평소 풍납토성 = 하남 위례성설을 강력히 주장해오던 [[선문대]]의 [[이형구]] 교수가 토성 내에서 진행되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 몰래 들어가 지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조사로 몽촌토성에서 나왔던 유물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에 들어가게 된다. 정부는 조금씩 풍납동 땅을 매입해서 건물들을 철거했고[* 이 과정은 현재까지도 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토성의 건축 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일부분을 절개하면서 풍납토성이 판축기법으로 세워짐이 밝혀졌다. 판축기법이란 황토, 모래 등 여러 종류의 흙을 정사각형의 판에 넣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하나하나 쌓아올라가는 방법이다. 이는 흙의 물성을 이용한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이며 '''풍납토성 정도의 성을 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 했다. '토성' 이라는 이름의 어감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데, 그냥 애들 흙장난 수준으로 성벽을 쌓으면 높이 쌓지도 못하고 몇 개월 버티지도 못한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삼국시대 이후 약 1500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이 깎여나간 부분이 많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그나마 몽촌토성은 공원화되면서 훼손을 비교적 잘 막기라도 했지만 풍납토성은 아예 지역 주민들이 농경지를 일구기도 하는 등(...) 대놓고 훼손을 해댔음에도 이 정도로 버티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방위 목적으로 만드는 성에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일 리가 없으니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거나 적어도 왕성의 일부분이었다는 추측이 점차 정설화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시절에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자 이를 막고자 흙을 구워 성을 쌓았다고 한다.[* 원문에도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고 하여 찔 증(蒸) 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도 해석이 분분했으며 현재는 석회석을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운 후 물과 진흙, 모래 등을 섞어 마치 시멘트처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지은 성이 남아 있다.] 토성 내부 조사 결과 탄화층이 약간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남하할 당시 고구려군이 약탈한 흔적으로 추측된다. 또한 군데군데 돌출부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치성도 있었다고 추측한다. 다만 치성이 있었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목재 따위를 이용한 임시 가설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