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납토성 (문단 편집) == [[위례성]] ==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확정된 건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단정짓는 직접 근거가 나타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의 규모나 축조에서 동원된 인원들, 또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규모로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확정짓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다 간접증거일 뿐이어서 확실하게 풍납토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2006년 풍납토성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위례성]]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이다. 당시에는 왕성에만 성 내부를 십자 형으로 가로 지르는 도로를 만들었으며, 그때 규정되는 도로의 폭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폭이 거의 비슷하다. 기록상으로도 가장 유력한 위례성 후보다. 현재까지 남은 여러 후보지들 중 [[삼국사기]]의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기록에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두를 통틀어 위례성으로 지칭하고 '''풍납토성을 북성(평지성), 몽촌토성을 남성(산성)'''으로 삼아 평소에는 풍납토성에서 지내다가 급박한 위기 시에는 [[몽촌토성]]으로 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평양성]] - [[대성산성]]이나 [[신라]] [[경주 월성]] - [[명활산성]]도 이런 방어구조를 택했으며, 후대의 [[후백제]] 평지 견훤왕궁 - [[동고산성]], 남고산성이나 [[조선]]의 [[한성]] - [[남한산성]] 역시도 이런 평시성 대피성의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 때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_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 가을 9월 풍납토성 일대는 한강변으로 수해에 노출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강을 통한 수운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기도 하니 백제의 고대국가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 위에서는 을축년 대홍수 때 쓸려나간 위험한 지역이라고 지적하지만, 반대로 보면 무려 을축년까지 1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 엄혹한 하상계수 속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한강 밀물의 영향이 미치는 종착점인 송파 바로 북쪽에 위치해[* 현재도 한강은 잠실대교를 기점으로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어는 구간과 얼지 않는 구간이 나뉜다.] 한강 수운은 원활하게 이용하면서 농업용수도 풍족하게 확보할 수 있는 매우 절묘한 위치였다. [[비류백제]]가 '''물이 짜서''' 주민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백제에 흡수되었다는 기록과도 맥이 통한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20&aid=0003005115&sid1=&ntype=RANKING|그리고 새로운 발굴 및 연구 성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