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납토성 (문단 편집) == 의문점과 반박 == [[이희진(역사학자)|이희진]] 등을 비롯한 일부에서 제기하는 풍납토성의 왕성론에 대한 의문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이희진 이름 자체가 스포같은데~~ * 무엇보다도 아직 왕궁터가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며 왕성이라하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작다. 한성백제박물관에 가면 왕궁터 재연 모형이 있으나 이는 아직 발굴되지도 않은 왕궁터를 상상에 기반하며 만들어 놓은 것이다. * 풍납토성은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붕을 올리는 방식의 굴립식 건물인데 이는 많은 무게를 견딜 수 없는 방식이라 이를 [[위례성]]이라 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흔히 동시대 [[일본]]과 비교해 '당시에는 굴립식 건물이 최고수준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자들도 몇몇 보이지만 그 당시 중국이 천 년 이전부터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 건물을 짓는 방식인 가구식 건물[* 가구식 건물은 굴립식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를 견딜 수 있으므로, [[위례성]]이라면 가구식 건물이 적합하다.]을 지은 것을 보면 굴립식 건물인 풍납토성이 [[백제]] 위례성이라는 주장은 백제는 '[[중국]]이 천 년 전부터 지어왔던 가구식 건물을 짓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나라'라는 말이 되어버린다. 또한 당시 고구려가 중원의 건축실력에 크게 뒤지지 않음을 감안했을 때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면 백제는 [[고구려]]의 왕궁보다 엄청나게 뒤떨어진 꼴이 되고 마니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한다면 [[고구려]]의 라이벌로 백제를 지목할 수 있나에 의문점이 들기까지 한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 우선 그 규모가 매우 작다고 했는데,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같은 시기 [[고구려]]의 [[국내성]], [[신라]]의 [[월성]]과 비교해보아도 '''풍납토성은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당장 경주 [[반월성]]에 비해 3배나 큰 것이 풍납토성이며 낙랑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낙랑토성보다도 크다.[* 현재 문화재청에서 사적11호로 지정한 면적만 39만 5829.8 ㎡이지만 이것도 일부에 불과하고 학계에서 대체로 추정하는 풍납토성의 면적은 그보다 훨씬 큰 26만평(약 86만㎡)이다. 경주 월성의 지정면적은 30만 2452 ㎡로 현 지정면적만 놓고 봐도 1천년 가까이 왕성 노릇을 한 월성보다도 크다.] 정작 다른 후보라고 내세우는 천안 성거산 위례성이나 하남 이성산성은 모두 풍납토성의 반도 안되는 규모다. 위에서 반론의 근거라고 제시한 일본의 후지와라쿄는 694년, 헤이조쿄는 710년에 들어와서야 수도가 된 곳이다.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가 3세기(201~300)로 비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300년 이상의 연대 차이를 보이는 성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걸 다 떠나서 축조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무시한 채 비교한 것으로, 백제 왕성과 [[고려]] 또는 [[조선]]의 왕성을 비교하는 짓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시기상으로는 후지와라쿄나 헤이조쿄는 오히려 후백제 완산성이나 태봉 송악 혹은 철원성과 비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 굴립주에 대한 지적은 위례 이후 시기인 웅진이나 사비 도심 및 궁궐에서조차 굴립식 건물이 발굴된다는 사실 하나로 간단하게 논파된다. 고구려 [[국내성]] 유적우도 주춧돌을 쓰지 않고 자갈로 다진 위에 올리는 굴립식인 점을 보면 비슷한 시기의 백제 도성 건물이 굴립주식인 것이 고구려보다 뒤쳐졌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성]] 유적의 자갈들은 4세기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그당시 고구려가 굴립주식임은 부정할수 없다. [[중국]]조차 민간의 건물에 대해서는 굴립주식을 [[한나라]] 때도 계속 유지했으니 이에 영향을 받아 [[고구려]]나 [[백제]]도 굴립주식을 유지한 것은 이상할 게 아니다. 게다가 이희진이 강력한 근거로 드는 [[일본]]의 경우 헤이얀쿄는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약 백년 후의 건축'''으로 중국 [[장안성]]을 모방한 배치구조이기에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이전의 [[아스카 시대]]의 건축물조차 굴립주식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당초 헤이안쿄 유적과는 수백년의 차이가 나는 풍납토성 유적을 1대1로 비교하는 것은 너무도 무지한 처사이다.''' 이러한 점들은 동아시아의 도성 건축방식에 대한 발달사를 무시한 결과이며 이것을 무시하는 반론들의 경우 근거를 시대의 순차를 뒤섞어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 왕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따지면 [[국내성]]도 아직 왕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성이라 할 수 없다.[* [[국내성]]도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성 내부에 이미 현대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따라서 발굴조사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직 왕궁터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는 [[코끼리]]의 모든 부분을 가린 채 코만 보여줘도 그 동물이 코끼리라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풍납토성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유구들 중에는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유구들(9호, 44호, 206호 등)이 존재한다. 이런 유구들과 함께 196호와 같이 [[중국]]제 도기들이 확인된 창고 유구, 수 천 점 이상의 백제토기가 확인된 유적은 풍납토성이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판축기법, 부엽공법 등을 통해 연간 수 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축조가 가능한 성벽 등은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한성백제]]의 거의 유일하고 최대의 왕릉군이라 할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과 가깝다. 다른 고대국가들도 대개 그렇듯이 백제의 도성과 왕릉은 비교적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에 부합할 만한 곳은 사실상 뻔하다. 무엇보다 위같은 주장이 나오는 근본적인 이유는 학술적인 의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발 및 부동산에 엮인 각종 이권을 대변하기 위해 풍납토성의 의의를 고의로 깎아내리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풍납동]]에 돈이 묶여있는 주민들이 해당 학설을 강성하게 지지한다는 점에서 그 저의가 명확해진다. 간혹 풍납토성 관련 영상 등에서 댓글을 통해 이러한 의문점을 증폭시키며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이곤 하는데, 이는 상술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경우다. [[유사역사학]], 특히 [[환빠]]계열의 신봉자들이 [[대륙백제설]]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인데,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있으면 대륙벡제가 성립하기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