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풍습(삼국지)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유비]]를 수행해 211년에 촉으로 들어갔으며,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를 따라 오를 정벌하러 갔다가 222년에는 [[이릉대전]]에서 대도독으로 참가해 무현에서 [[오반(삼국지)|오반]]과 함께 [[이이(삼국지)|이이]], [[유아(삼국지)|유아]] 등이 이끄는 오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윤6월에 [[육손]]이 화공을 성공시키면서 그 여세를 몰아 육손이 총공격을 감행하게 하자 최전방인 효정에서 유비군이 격파되면서 [[반장(삼국지)|반장]]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계한보신찬의 평에 따르면 적을 가벼이 여겨 시기를 잃고 위험을 불러일으켰으며, 장남이 분투했다가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어 재난은 한 사람에서 생겨 커진다고 하였다. 이릉대전에서 전사하기 이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워낙 적어서 알 수가 없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귀신 같은 유비가 풍습에게 촉군 대도독이라는 중책을 맡겼을 정도니, 이릉에서 사망한 촉군 2세대 장수 중 필두의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위의 계한보신찬 기록에서 보이는 뉘앙스로는 승리 이후 육손군을 깔보다가 지휘상 실책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풍습이란 인물의 배경과 정사 삼국지의 집필배경을 생각하면 기록이 빈약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닌데,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서진의 관료로 위나라가 정통이란 관점이라 기본적으로 촉의 기록이 더 부실한데다 진수는 촉나라 출신이긴 하지만 풍습이 죽은지 10년도 더 지나서 태어난 인물이다. 만약 이릉대전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면 다른 굵직한 사건에도 이름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러질 못했으니 후대 사람인데다 서진의 역사가인 진수 입장에서는 전 세대에 있었을 그의 활약까지 굳이 기록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릉대전은 촉한의 황제 유비가 직접 원정을 지휘한 총력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천하의 조조조차 라이벌로 인정하는 유비가 나섰는데, 관우나 장비라면 몰라도 풍습 정도가 사관의 주목을 받기는 무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