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이토리아니 (문단 편집) === 전장에서의 역할 === 하지만 어쨌든 프라이토리아니의 본분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던 황제를 호위하는 엘리트 부대였던 만큼, 이들은 전장에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 별다른 활동 기록이 없지만, 그의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와의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고문단을 편성해서 파견될 당시 여러 명의 백인대장과 세야누스 등 젊고 유능한 군인들을 따라 보냈던 것을 볼때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호위부대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직후,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군단들을 선무하기 위해 정부 대표로 아들 소 드루수스를 보낼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2개 대대와 게르만 기병들이 드루수스를 호위했다. 이런 흐름은 티베리우스 이후 칼리굴라 시대부터 달라지는데, 기록에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갈리아 출정과 클라우디우스 1세의 브리타니아 원정에는 황제가 장기간 이탈리아 밖으로 떠난 만큼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동행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때도 전장에서 직접 활약했는지는 불확실한데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 황제가 직접 출전했던 베드리아쿰 전투나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황제가 전선에 나설 경우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군의 최정예 전력으로 활약했고, 그 지휘관인 근위대장들 또한 전선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도미티아누스]] 시절 다키아 족과의 전쟁에서 근위대장 푸스쿠스가 지휘를 맡았다가 전사하는 등, 프라이토리아니가 겪은 손실 또한 만만찮았던 듯하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에도 열심이었지만, 대개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과 근위대장들은 황제를 따라 광대한 전선을 누비며 꾸준히 활약했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때는 근위대장이 황제와 함께 페르시아를 상대로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근위대장까지 에데사에서 포로가 됐고 포로 생활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다만 프라이토리아니들이 제대로 구르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전선의 군단병들은 항시 전시인 자신들과 달리 로마에서 편히 지내면서 월급도 더 받는다면서 미워했다고 한다. 한편 전장은 아니지만 [[폼페이]]로 유명한 서기 79년 베수비오스 화산 분화 당시 프라이토리아니가 피난민 구호를 위해 투입되었을 것이란 증거가 나왔다. 2021년, 연구자들이 1980년대 헤르쿨라네움 근방의 해변에서 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된 300여 명의 병사들 중 한 유골이 프라이토리아니의 고위 장교였다고 결론내렸다. 같이 발견된 주화들이 근위대의 월급 액수와 일치하고 각종 호화로운 장비를 걸치고 있었으며, 타원형 방패가 이들이 사용하는 제식 장비였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한 것.[[https://www.nbcnews.com/news/world/2-000-year-old-skeleton-identified-senior-roman-soldier-vesuvius-n1267056|#]] 당시 이탈리아 본토의 로마군 정규 병력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유일하므로 급한 대로 이들을 투입하였고, 저 유골의 당사자 및 병사들은 피난민 구호 작업 와중에 분화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