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이토리아니 (문단 편집) === 쇠락 및 폐지와 그 이후 === 그러나 제국군의 최정예 엘리트 부대라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장하며 쇠락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여러 정예 기간병들을 빼내서 '''요비아니'''([[제우스]])와 '''헤르쿨리아니'''([[헤라클레스]])라는 황제 호위부대를 새로 편성했기에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과 규모 그리고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소위 [[사두정치|4두 정치]][* '테트라키아(Tetrarchia)'라고 부른다.]를 실시하면서 황제들이 각 전선 근처에 상주하게 되었고, 그 전선들에 배치된 군대를 직속부대로 거느리자, 이탈리아와 로마 방위가 주된 임무가 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직속부대라는 존재가치와 제국 최고의 정예부대라는 명성을 잃었다. 수많은 황제를 갈아치우거나 살해해온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서기 306년에 [[막센티우스]] 황제를 옹립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폐위시킨 것이었다.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계속되고 있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의 프라이토리아니 해체 작업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후 6년간 프라이토리아니는 막센티우스 황제 치세하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고 로마로 입성하면서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큰 자비를 베풀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그런 그가 완전히 이긴 전투에서 이렇게 강하게 저항해서 아군에게 크게 손해를 입힌 적군을 용서해줌은 적어도 그 사건 이전엔 사례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에 있던 근위대 기지를 철거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폐지했다. 다만 그래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살아남은 프라이토리아니들의 경우, 비록 그에게 적대하긴 했지만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모습엔 크게 감동하여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게르마니아 방면 국경으로 이동 배치해서 현지 리미타네이로서 먹고 살게 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그곳 지역에서 크게 용맹을 과시했다고 한다. 한편 어찌어찌 남은 일부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새로 창설한 근위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의 기간병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정황은 있으나, 이는 리미타네이로 활약한 기록이 분명히 있는 전자와는 달리 확고한 근거는 없어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정도 추측만 할 뿐이다. 한편 'Praefectus Praetorio'[*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라는 칭호는 여전히 존속했지만, 무관적 성격은 신설한 Magister Peditum(보병) / Equitum(기병) / Miletum(통합)[* [[대제]](大帝)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에게 넘어감으로써 완전히 사라져 지방관의 성격을 일정부분 갖게 되었다. [*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Praetorian_prefect|Praetorian prefect]]를 보면 'the office was much reduced in power and transformed into a purely civilian administrative post(순수한 문민 행정 직위), while under his successors, territorially-defined praetorian prefectures emerged as the highest-level administrative division of the Empire. The prefects again functioned as the chief ministers of the state, with many laws addressed to them by name.'와 'Under Constantine I, the institution of the magister militum deprived the praetorian prefecture altogether of its military character but left it the highest civil office of the empire.' 등의 내용이 나온다.] '''즉 'Praefectus Praetorio(Praetorian Prefect)'는 같은 용어라도 제정 초기와 후기 때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확실하게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는, '근위대장'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절대 안 되며, 대강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인식하면 되지만,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익숙한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전혀 아니었고, 중앙정계에도 힘을 발휘하는 자리였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영역에 포함하고 있는 동방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총리 내지는 수석 각료(first minister)로서, 동로마 전체에서 넘버 2였다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Praetorian_prefecture_of_the_East|Praetorian prefecture of the East]] 중, 'the praetorian prefect was the second most powerful man in the East, after the Emperor, in essence serving as his first minister.' 등의 내용이 나온다.] 반면 이탈리아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마기스테르 밀리툼(군 총사령관)에 밀려서[* 좁게는 이탈리아 관구나 대관구, 넓게는 서로마 전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5세기 서로마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가 없는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리키메르]] 등이다.] 동방의 프라이펙투스만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숙군 작업 등으로 동로마에서는 일종의 [[문민통제]]가 잘 유지된 반면, 서로마에서는 문민통제가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본인 스스로가 군 지휘능력을 갖추고 친정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5세기 서로마사 내내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어렸거나 혹은 문민 원로원 의원 출신인 탓에 군 지휘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세]]로 자리매김했었기 때문이다. 한편 위와 같이 전통적인 근위대였던 프라이토리아니가 해체되었고, 그 수장이었던 프라이펙투스의 성격이 변했다고 해서 근위대가 없어진 건 전혀 아니며, '''스콜라이 팔라티나이'''(Scholae Palatinae)를 새로운 근위대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설했고, [[레오 1세(황제)|레오 1세]]가 또 다시 새로 창설한 부대가 '''엑스쿠비토레스'''(Excubitores)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서 레오 1세까지는 100여년 밖에(?) 안 됐는데 왜 또 새 부대를 창설했는지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유는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연이 전혀 없이, 당시 군부의 실권자 [[아스파르]]에 의해서 그의 '''부하장수'''였던 레오 1세가 옹립되어서 기반이 약했고,[* 아스파르는 일종의 귀화한 게르만 부족장 1세대라서 본인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귀화 1세대라,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어서, 캘리포니아 지사를 지내고 나서 충분히 도전해볼 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으로 막혔던 것을 생각해보면 유사하다.] 그래서 동로마 군부 내 게르만 세력이, 테오도시우스 왕조 시절에 비해 제어를 받지 않아 지나치게 강해졌던 것에 대한 조치로서, 비(非) 게르만계 로마 본국인으로만 구성된 새 근위대를 창설했던 것이었다. 향후 사위이자 로마 국내에서는 매우 오지였던 이사우리아의 부족장 [[제노(로마)|제노]]가 황제가 되고 나서는 동향인 이사우리아인 위주로 엑스쿠비토레스를 거의 채웠었던 적도 있었다. 이사우리아는 전술했듯이 아주 오지라서, 200여년 전의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과 이에 따른 민족/종족 구분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취급은 반쯤 이민족 취급이라서, 선황 레오 1세의 창설 취지였던 '비(非) 게르만계 로마 본국인만의 부대'라는 점에 있어서 이사우리아인으로 근위대를 채웠던 것은 거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로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다른 외국 전공서적에서도 이사우리아인은 타 종족집단에 비해 동로마 지역에서 일종의 [[소수민족]] 비슷하게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Two Romes'라는 책의 401p에 'After 400, there were hardly any enclaves of ethnic separatism in the lands that would become Byzantium, and even those (e.g., '''the Isaurians''') did not hold out for long. Certainly there were no ethnic “Greeks” left.'라는 대목이 있다. 대강 번역하면, 400년 이후 동로마 권역에서는 자기들끼리 특구를 이뤄서 살던 소수민족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이사우리아인''' 같은 종족들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종족적인 "그리스인"들은 확실히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아스파르와 일가에 대한 숙청으로 게르만 세력이 군부에서 정리되었고, 이사우리아인도 황제의 출신 종족(?)으로서 제노 시절 기득권을 누리다가, 온전한 로마 본토인이었던[* 부계 직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형제를 통해서 콘스탄티우스 1세의 7대손이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들어서 기득권을 뺏긴 나머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https://en.wikipedia.org/wiki/Isaurian_War|영어위키 항목]]] 제압됨으로써[* 이외에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 때에는 반란이 여럿 있었는데, 로마 본토인이었던 점은 좋았지만, 나이가 많았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갖추지 않은 순수 문관 출신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단성론]]자였던 점이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이민족의 영향이 사라졌고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 이 점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본인이 군사령관으로서 친정했던 적이 전혀 없고, 장군들에게만 대외 원정을 맡기면서, 지휘관 교체와 경질을 마음대로 했는데도, 반란 등의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방증된다. 그렇다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엑스쿠비토레스의 창설 후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자제들이 [[친목질]]하는 [[의장대]](parade-ground display troops)로 변하여 실질 전투력은 사라졌다. [*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Scholae_Palatinae|Scholae Palatinae]] 문서 중, 'they degenerated to parade-ground display troops: as it became possible to buy an appointment into the ranks of the scholae, and the social status and benefits this entailed, the units were increasingly filled with by the capital's well-connected young nobility.']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부대도 원정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운을 뗐다가 귀족 자제들이 [[충공깽]] [[멘붕]]에 빠져서 결국 단념하고서는, 도리어 편제된 정원 외의 순전히 매관매직용 추가 TO(supernumerary)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존의 매관매직 관행을 아예 제도화시켜서 국가재정에 보탰다.[* 마찬가지로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Scholae_Palatinae|Scholae Palatinae]] 문서 중, 'Emperor Justinian is said to have caused panic amongst their members by proposing that they be sent on an expedition. Justinian also raised four "supernumerary" scholae of 2,000 men purely in order to raise money from the sale of the appointments. It seems that this increase was reverted by the same emperor later.'] 그러나 이슬람 제국의 맹공과 불가리아의 강습으로 나라가 양면전선으로 풍전등화 상태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5세가 전격적으로 실질 전투 능력을 발휘하도록 실질적 훈련도 하고 실전에도 나가도록 지시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편한 부대 생활 전통은 사라졌다. 한편 엑스쿠비토레스는 실질 전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디라키움 공방전#s-2|1081년 노르만인과의 디라키움 전투]] 때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함께 전멸하면서 부대 자체가 통째로 증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