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어 (문단 편집) == 역사 == 최초의 프랑스어 사용례이자 프랑스어 문헌으로 손꼽히는 것은 842년 2월 14일 작성된 [[스트라스부르 서약]]이 유명하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은 연합하여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리우스 1세]]를 협공했다. 그는 아버지인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틀어 자신을 왕국의 왕으로 선언하는 과실을 저지른다. 이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협공해 841년 7월 25일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리우스 1세는 패하여 [[아헨]]으로 피신하고, 둘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동맹 맹약을 맺었고 이를 그자리에서 문서화한 것이 바로 스트라스부르 서약이다. 당시 서약은 서류상 내용은 라틴어로 적혀 있고, 두 왕이 선서한 내용만은 각 왕들의 말을 라틴어 번역 없이 그대로 옮겼다. 카를 2세의 말은 '''고대 프랑스어'''로, 루트비히 2세의 말은 [[고지 독일어]]로 작성되어 문헌적 가치가 상상을 초월한다. 두 언어가 어떻게 파생되어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볼때, 바로 그 초기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고고지 독일어 사료는 스트라스부르 서약문이 발굴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아니지만, 역사적 가치는 월등하다.] 서류는 카를 2세의 친척이자 [[샤를마뉴]]의 외손자인 '''니타르트''' 후작이 자필로 작성했는데, 그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사용(기록)한 자'''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니타르트는 후에 카를 2세의 상속과 관련된 서류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 언어학에서 프랑스에게 붙여준 별명 중 하나인 '''[[방언]]의 왕국'''이 증명하듯, 16세기까지인 중기 프랑스어까지만 해도 표준어가 없이 수많은 방언이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사용되던 언어는 수도가 위치한 파리 등지의 방언인 프랑시엥어(francien)였고, 왕궁에 드나드는 귀족이나 귀족에 소속된 문장관들은 모두 프랑시엥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당시 문학이 주로 생산되던 곳은 교회였기에, [[라틴어]] 자료들이 여전히 월등히 많았고, 백성들을 위해 알기 쉬운 고대 프랑스어로 창작된 몇 개의 성가극이나 <[[롤랑의 노래]]>처럼 구전되던 옛 전설을 기록한 작품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아서 왕]] 연작 등의 자료는 그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3세기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를 진압하면서 [[발루아 왕조]]는 봉건 영주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빌레르-코트레 칙령(L'ordonnance de Villers-Cotterêts)을 발표해 공적인 자리에서의 모든 방언 사용을 금지해버린다. 봉건 영주들이 각 지방어 사용을 자제하게 되면서 프랑시엥어가 지방 귀족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16세기까지를 '''중기 프랑스어'''의 시대로 규정한다. 이 때부터 프랑스어의 표준어라는 개념이 확립되었다. 이 시기동안 생산된 문헌 사료의 양은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한데, 당시 유럽 국가들처럼 프랑스 역시 사람들의 모든 사회 활동과 행정적 업무를 문서로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라틴어에서 본격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하기는 했지만서도 여러 변형이 아직 정리되지 못하기도 했으며 작가들이 자기네 지방에서 사용하던 용어를 작품에 올리면서 해석이 막히는 경우 등 아직 혼란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재상 [[리슐리외]]의 전적인 후원 아래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 현대 프랑스어가 완성되기도 했다. 당시 중앙 집권을 강화하던 [[루이 14세]]에게 언어의 통합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강조했고, 왕의 지원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사전 편찬은 날개를 달았다. 당시 사전에 수록할 표준어휘와 백성들에게 가르칠 표준문법을 정리했는데, 표준어휘를 정하는 기준은 특별한 게 없고 당시 회원들의 토론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회원 대부분은 귀족 신분이었던 탓에 지방 백성들이 쓰던 표현들은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 자체도 품이 많이 드는 탓에 여러 재정난을 이유로 몇 번 중단되기도 했고, 한 회원은 리슐리외가 하도 닦달하는 탓에 제대로 검수도 하지 못하고 사전을 냈다고 회상했다. 언어적으로는 줏대 없는 가위질에 문법이 잘려나갔지만, 문학적으로는 가장 풍성한 시기였다. 시인 롱사르를 필두로 플레이아드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고전 문법인 알렉상드랭을 부활시켰다.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고전과 라틴어 문학에서 벗어나 프랑스어의 고급화, 문예화를 꿈꿨던 그들은 12격음율인 알렉상드랭[* 한 행에서 음절을 12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연결된 두 행의 어미로 각운을 만든다.]을 다시 사용해 적극적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아카데미와 반대로 이들은 프랑스어는 물론 각종 지방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에서 어휘를 적극 차용해 문학적 언어로서 프랑스어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알렉상드랭은 이후 희곡작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사용되게 이르는데, 프랑스 3대 대작가로 꼽히는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몰리에르가 적극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