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크푸르트 (문단 편집) == 역사 ==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팔츠]]가 존재하는 도시 중 하나였으며, [[독일 왕국]] 시대에는 수도였고,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는 [[황제]] [[선거]]가 열리는 도시였다. 다만 독일 왕국에서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나 '[[수도(행정구역)|수도]]'는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아서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였기에 수시로 바뀌던 만큼 그 자체로서 의미가 크지는 않다. 황제 선거는 [[쾰른]]이나 [[레겐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에서도 열렸다. 다만 [[막시밀리안 2세]] 이후로 대부분의 황제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선거가 끝나면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바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빈 회의]] 이후에는 [[독일 연방]]의 4개 [[자유도시|자유시]] 중 하나가 되었다.[* 나머지 3개 도시는 각각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 이들 셋은 [[한자동맹]]의 주요 구성원이기도 하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점령당한 이후에는 신설된 헤센-나사우 주에 강제통합되었다. 이후 [[보불전쟁]]을 종결지은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youtube(l-aCFLpresQ)] 독일의 패전 직후 1945년, 폐허가 된 프랑크푸르트 1945년 독일의 분할 점령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미국 점령지의 수도가 되었고 뒤이은 [[냉전]] 시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자 세계 제일의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다. 헤센 주 북동쪽의 [[튀링겐]]과의 경계선부터 프랑크푸르트까지의 저지대 계곡 지역을 두 갈래로 관통하면 단숨에 [[서독]]을 반으로 쪼개고 미군의 증원기지 2곳(라인-마인 공군기지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을 지나 [[프랑스]]로 진격할 수 있는 최단루트였다. 이를 두 갈래 루트가 시작되는 마을인 풀다의 이름을 따서 풀다 갭(Fulda Gap)이라고 한다.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틀림없이 [[소련군]] 주력군의 진격로 중 하나가 될 것이 유력했다. 당시 상정되던 루트 3개는 1. 북독일 평원루트, 2. 풀다 갭, 3.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가를 따라가는 루트였다. 한 때 [[NATO군|나토군]]의 주력 군대는 물론 [[핵무기]]까지 배치되었고 미-소 간에 관계 악화 뉴스만 나면 초긴장상태였다. 물론 [[냉전]]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는 전략적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냉전]]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관광지]]가 되었다. [[1848년 혁명]] 때에는 독일 국민 의회의 개최지가 되었다. 이 때의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독일 [[자유주의]]의 본산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서독 정부 수립 당시 수도 후보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후보였다. 전쟁 이전부터 이미 경제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서독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주도(행정구역)|주도]](프랑크푸르트가 있는 헤센 주의 주도는 근처의 [[비스바덴]])가 아니라는 점도 작용했다. 또한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미군 관할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한 적이 있어서 행정 중심지로서의 자격 또한 충분했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에 독일 의회로 사용할 건물도 지었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동서독 국경]]에서 매우 가깝다는 안보상의 문제가 있었던 데다 서독의 초대 [[독일 총리|총리]]이자 [[국부]]인 [[콘라트 아데나워]]가 [[쾰른|자기 고향]]과 가까운 [[본(독일)|본]]을 수도로 밀었고, 다른 정치인들 또한 규모가 크고 역사가 깊은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를 수도로 정할 경우 "프랑크푸르트가 서독의 공식 수도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베를린]]으로의 환원이 힘들어지게 되며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본이 수도로 결정되었고, 수도기능 수행을 위해 서독 정부는 추가로 9,500만 마르크를 지출해야 했다. 그 후 [[1990년]] [[독일 재통일]] 당시에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 대신 프랑크푸르트를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지지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현대 독일의 기원이 [[프로이센 왕국]]이며 베를린의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을 수도로 남겨두되, 다른 지역들([[뮌헨]],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에어푸르트]], [[본(독일)|본]],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등)에 주요 기능들을 분산시킴으로써 '''수도는 상징으로 남는 지방 분권의 연방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베를린을 수도에서 해제한다면 결국 이는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며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의식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 연도별 정리[* 출처도서 -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 * 794년 최초로 문서 기록에 등장 * 1220년 [[제국자유도시]] 지위 획득 * 1330년 두 번째 정기시 개최권 획득 * 1356년 [[카를 4세]]의 <[[금인칙서#s-2.8]]>에서 황제 선출 도시로 선포 * 1562년 [[막시밀리안 2세]]부터 [[황제]] [[대관식]]의 장소로서의 [[전통]]이 시작됨 * 1843년 최초의 [[증권거래소]] 창설 * 1848년 바울 교회에서 독일 최초의 민주적 의회인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소집 * 1914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개교 * 1948년 [[독일연방은행]]의 전신인 독일중앙은행의 창설 * 1998년 [[유럽중앙은행]] 설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