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비슬린스키 (문단 편집) == 역사 == 프리비슬린스키가 설치되었을 당시는 [[1832년]] 11월 봉기와 [[1863년]] 1월 봉기로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일개 주로 격하되어 급속하게 러시아에 편입되어 가던 시기이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 제국군]]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던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 제국군 장교가 쳐들어와서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툴면 교사들을 갈궜다고 한다.[* 출처는 [[이브 퀴리]]가 쓴 마리의 전기인 <마담 퀴리>로, 국내에는 2006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마리 퀴리 역시 10대 시절 이 일을 직접 겪었고, 러시아어가 유창했기에 무사히 넘어갔으나 나중에 민족성 훼손에 모멸감을 느끼고 울었다.] 이같이 가혹한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반러|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샀다. 마리 친구의 오빠는 폴란드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 친구들은 [[러시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다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되었고, 폴란드는 이듬해인 1918년에 독립했으며, [[마리 퀴리]]는 1934년까지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원수인 러시아 제국의 패망과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모두 지켜보았다. 여담으로 퀴리 부인이 1934년까지만 살아계셨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을 수도 있다. 당장 5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면...]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가 [[일제강점기|한국]]과 [[일치시기(중화민국)|중국]]에게 했던 정책을 러시아가 그대로 했다고 봐도 된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말살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하여 살던 [[러시아인]]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계 폴란드인|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제국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