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톤 (문단 편집) ==== 사상 ==== '''유의사항''':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 가지의 탐구법이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었던 당시의 아테네 또는 그리스의 시대상을 파악한 뒤 플라톤의 생각 변화를 기점으로-즉 역사주의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이 첫째요,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한 비역사주의적 탐구 방법이 둘째다. 이는 현재의 학자들도 논쟁이 있는 부분으로,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는 중도를 택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국가는 주제 면에서 대단히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그렇지만 대화편 형식인 까닭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플라톤의 본심인지 아니면 역설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문학적 형식인지도 불분명한, 후세인들이 풀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를 몇 개로 나누고 다시 그 정치체제들의 등급을 나누고 하는 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차라리 그건 현실정치에 더 초점을 맞춘 훗날의 대화편인 법률이나 정치가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되는 바다. 국가가 이렇게 당대 인간생활의 수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justice)라고 할 수 있다. 대화편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노신사 케팔로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야기의 소재가 정의로 튄 것으로 불이 붙는다. 케팔로스가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난 이후, 불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를 통해 더욱 격화된다.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비교적 소박한 정의관, 정직하고 공평하고 잘 대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자주 그러하듯이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면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한다고 해도 불의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생각을 가다듬고는 정의는 친구에게는 유익함을 가져다 주고 적에게는 불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을 바꿨다. 왜냐면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받고 나서 보니 정직함, 공평함과 잘 대해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인물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트라시마코스]]가 [[김두한(야인시대)|개소리 집어치우라며]] 토론에 난입한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남한테 해를 끼치는 건 정의가 아닙니다하는 견해와 더불어 자기가 먼저 말하면서 주장을 만들기보다 남이 말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태도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아무리 정의로운 도시국가라도 전쟁도 막 일으키고 그러면서 남한테 해를 끼친다. 또, 전설이나 역사 속의 영웅들도 어떻게 보면 남한테 해를 많이 끼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런 부분에서 [[트라시마코스]]가 분노한 것처럼 보이게 대화편을 썼던 것 같다.] [[트라시마코스]]는 벌컥 화를 내고 기세를 돋우면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왜냐면 보통 법률이나 규칙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시국가의 법률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어떤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법률을 만드는 사람(입법자)에게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란 힘이 있는 강한 사람들이며, 그 강한 사람들이 법률을 만들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움이란 개념은 허위이며, 정의의 실체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인데 법률의 실체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편다.[* 법 말고는 뭐 없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현대의 법실증주의와 닿아있다.] 도시국가는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생겨나면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처벌하지만 실은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든 법률을 어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안티폰]] 항목에서 써 놓은 바 있지만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생각은 당대 소피스트들이 실제로 펼쳤던 주장이며 플라톤이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작중 등장인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법률을 따르는데 그게 지배자의 이익이 아니고 시민의 이익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배자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정의가 항상 강자의 이익인가?' 하면서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견습공은 실수를 하지만 장인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진정한 지배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지배자는 미숙한 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그럼 진정한 지배자는 지배의 기술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인데, 다른 모든 기술들이 그렇듯이 기술이란 것은 의술(醫術)처럼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강자만의 이익이란 것은 말이 이상하지 않냐' 하고 논의를 펼치자 [[트라시마코스]]가 '양과 양치기와 주인을 생각해 봐라. 양치기가 아무리 양을 잘 돌봐줘도 결국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하고 받아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어느 정도 기가 죽은 데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양치기의 비유 역시 단점이 많아서[* 결국 양치기 역시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면 주인도 이득을 주고 자기도 이득을 얻는다. 이와 더불어, 1권에서 플라톤은 양치기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보수 획득술이라는 별개의 기술(techne)이 고유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아 [[트라시마코스]]가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라는 구절은 어느 정도 독자연구지만 희곡 형식인 대화편의 맥락을 볼 때 그렇게 보이는 점이 있다. 또 이런 부분이 플라톤 대화편의 문학적 묘미이기도 하다.] [[트라시마코스]]는 물러나게 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트라시마코스]] 문서에서 서술하도록 한다.] [[트라시마코스]] 이후의 논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폴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에 의해 진행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주제가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나머지 그 주제에서 끝장을 보길 원하며, 자신들이 소크라테스에 반론하거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반박의 논리를 펼침으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길 원하고, 더욱 선명해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극중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상대하기 버거워해 퇴장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많은 의문과 토론을 불러일으킨 논설이었다.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제기한 의문들은 대강 이렇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정의는 어렵고 불의는 쉬운가? 왜 정의를 행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불의를 행한 사람이 이득을 보는가?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정의라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하고, 어기면 처벌 등의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제약이 없고 자유롭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 불의가 판칠 것인가? 본심이 아니라 억지로 정의를 따르는 것은 좋은가 나쁜가? 사람들은 그저 수치스러운 평판을 피하기 위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선생님, 부디 저희에게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정의란 것은 단지 그것이 정의란 이유만으로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을 함께 토의하기 위해, 그 어려운 문제들을 보다 더 쉽게 살펴보기 위해 개인이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라는 큰 그림에서 정의가 어떤 것일지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올바른 행동과 법률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논의는 개인 차원의 정의, 법률, 이익, 욕망 등이 얽힌 문제에서 국가, 사회구조와 같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은 1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케팔로스의 아들이 정의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은 2권에 속한다. 이 나머지 9권의 분량 동안 정의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는 교육, 사회, 국가, 예술, 정치, 영혼, 윤리 등 많은 분야를 건드리게 된다. 국가는 그 과정에서 3가지의 주요한 입장을 등장시키는데, 첫째 입장은 노신사 케팔로스가 제시하는 헬라스 세계 종래의 소박한 도덕관이다. 그리고 피시스와 노모스를 구분하는 소피스트를 대표하여 트라시마코스가 있고, 마지막으로 플라톤 본인의 주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플라톤은 앞선 두 주장을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개인의 행복과 정의는 도시의 행복과 정의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냐면 법과 정의, 행복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법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개인은 법을 지켜도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 법을 어기면 불이익을 받아 행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도시의 법이 정의로워야만 도시에 속한 개인 역시 정의로운 법을 문제 없이 준수하면서 괜찮은 생활을 꾸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를 그리기 위해 플라톤의 상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얘기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혼자서 살기는 어렵고 사회에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마 플라톤은 사람들이 서로 의존적이며 사람 한 명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진정한 기술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인간은 각기 타고난 적성이나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재능이나 적성에 따라 직업이 알맞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런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좋은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화를 창조해내서,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특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를 채워준다.[* 1권에서 제화공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기술을 발휘해 좋은 구두를 왕창 만들어서 남을 이롭게 해준다는 얘기를 했다.] 즉 인간이 공동으로 모여사는 이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부족하지만 필요한 부분을 협력해서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각자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단계로 1단계로 건강한 도시, 즉, 말하자면 돼지들의 도시, 2단계로 정화된 도시 즉 말하자면 군인들의 도시, 마지막 3단계로 아름다운 도시 즉 말하자면 철학자가 통치하는 도시의 3단계가 제시된다. 건강한 도시는 각자가 각자에게 필요한 적성에 맞춰 생활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알맞은 인원이 알맞게 모여서 알맞은 일을 하며 정부가 없이도 잘 돌아간다.[* 현대인인 우리는 사람의 적성이나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해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에 관해 옛날 사람들다운 순진한 개념을 통해서, 자연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균형을 맞춰놓는다고 대답한다. 옛날에는 플라톤 말고도 자연이 알아서 균형을 맞춰놓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말이 되지 않는데,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순진무구하게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덕(ἀρετή), 즉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제해서 얻는 기술적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고, 돈과 부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몇 개씩이나 겸직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빈부격차가 나타나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자연히 정부의 필요성이 나타나며, 영토확장의 욕구 또한 나타나게 된다. 영토확장의 욕구와 함께 전투의 기술에만 집중하는 전사계급이 나타난다. 돈 버는 기술이 최고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렇게 전투의 기술 아래 귀속되는 것처럼, 전투의 기술도 최상위의 기술 아래 포섭되게 되는데 바로 철학이다. 어쨌거나 전사가 아무리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 해도 올바른 적을 상대로 올바른 타이밍에 용맹하게 싸우는 게 중요하지, 잘못된 적을 상대로 쓰면 소용이 없으니까. 이런 전투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군인들의 강한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 수 있도록 음악과 시의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 때 제공되는 예술은 적절한 것만이 필요할 뿐, 도시가 추구하는 정의에 걸맞지 않고 사람들의 심성을 어지럽히는 나쁜 시와 음악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인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신들이 전혀 정의롭지 않고 이상한 놈팽이들로 묘사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도시는 건전한 시와 음악만을 필요로 한다.[* 시와 음악이라니까 소설과 음악 교육으로 느껴지겠지만, 당대 뮤즈의 역할을 고려해 볼 때 역사와 도덕 및 상식 교육까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나는 사형 판결을 받아도 두렵지 않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위대한 인물을 만나볼 텐데 그게 좋으면 좋았지 뭐가 죽음이 무섭다고?" 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혹은 뻔뻔하게 응수하는데, 이 때 '저승 가면 만나볼 위인들' 중에 한 명으로 바로 호메로스가 언급된다. 시인 추방론을 말한 <<국가>> 대화편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재판보다 이전 시점이라는 설정인데(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뒤일 리 없으니), 대화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 앞에서는 호메로스를 까다가, 정작 재판에 가서는 호메로스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운 꼴이 된다(...). <<변론>>이 실제 소크라테스의 재판 기록에 기반해 사료로서 쓰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인에 대한 견해는 다소 차이가 있었던 듯 하다.] 체육과 음악 교육을 받은 군인 계급만으로는 이상적인 도시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우월한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철학 교육까지 제공되어야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절제[* 고대 희랍인들은 절제라는 덕목을 대단히 좋아했다. 기본적으로 이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 것 같다. 포도주 같은 것을 예시로 들기 좋아했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셨는데 너무 타면 맛이 없고, 생으로 포도주를 마시면 야만인들이나 그렇게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균형, 절제, 중용을 중요시했다. 아니 그건 세상 사람들 다 그런 거 아닌가? 싶다면 싸우고 또 싸우다 뒤지면 예! 천국에서도 싸우고 또 싸우는 발할라가 기다린다네~ 식의 무지막지한 생각을 하던 바이킹이란 족속도 있었다.]의 미덕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부류가 주장하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는 무력과 욕망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력과 욕망을 함부로 남용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어쩌면 현실정치에서는 그처럼 이익을 위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결코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테네인들이 멜로스를 멋대로 침공했던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도시는 무력을 남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은 폭력 위에 우리의 현실이 기반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득에 눈이 멀은 도시가 폭력을 남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현실적 사항을 도외시하고 오직 이상과 정의만을 생각해 볼 때 폭력의 남용은 정의가 아님이 자명하다. 이상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도시 전체가 절제의 미덕 아래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만 집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도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사유재산이라던가 가족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주장이지만,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적인 공유제야말로 정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절제로 가득찬 도시, 사유재산의 폐지와 절대적인 공유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자뿐이다. 전사계급에게 시행되는 통제된 예술교육만으로는 사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절대적인 공유제를 실현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흐름 아래에서, 도시의 세 계급이 서로 다른 일을 해도 정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잘 맞는,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절제라는 기치 아래에서 잘 짜여진 공동체 도시에서는 세 계급이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제까지 도시와 개인을 쭉 유비관계로 다뤄 왔는데, 그에 따라서 도시가 세 가지 계급이 있는 것처럼 유비관계를 통해 개인의 영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욕망, 혈기, 이성이 그것이다. 가장 뛰어난 이성에 의해 개인의 영혼이 금전욕에 빠지지도 않고 무절제한 분노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그는 정의로울 것이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플라톤이 다른 대화편에서도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 정의로워 보이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통제된 상태가 아니라면 완전히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정말로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행하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유비관계는 도시에서와 달리 인간의 욕망과 혈기가 상하나 우열관계를 갖느냐고 반문했을 경우 뾰족한 대답이 나오기 어렵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우열관계가 비교적 확실한 도시를 먼저 예시로 제시한 다음 인간의 영혼으로 넘어가면서 그런가보다 하고 느끼도록 대충 뭉개고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미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물론 가족을 폐지해 버리면 2세대의 생산이 멈춰버리기 때문에 이를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플라톤이 희한하긴 하다. 성생활과 출산은 몸의 욕구, 즐거움이 아니라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일 것임은, 이 문서를 잘 읽었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플라톤은 머리를 굴려서 나오는 결론에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감각적인 쾌락은 쳐주지 않으니까. 어쨌든 플라톤의 이 주장은 그 비현실성뿐만 아니라, 가족의 폐지가 과연 철학자들까지인지, 전사계급까지인지, 아니면 도시 구성원 전체에 이르는지 그것도 명확하지 않고, 전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얘기라면 아기를 도대체 몇 살부터 부모와 분리해야 하는가 등 구멍투성이지만 그러려니 하자.][* 사실 앞의 주석은 사실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예컨대 사유재산의 폐지나 가족의 폐지는 단순히 플라톤이 공산주의적 사상을 지님이 아니다. 플라톤의 사유재산 철폐와 가족의 해체는 결국 수호자(방위자+통치자)들에게 해당되며, 그 이유는 국가에서 혼의 '이성적 부분'에 해당하는 통치자 계급이 사유재산이나 가족에게 그 기능(ergon)을 쓰게 될 경우 통치자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플라톤은 통치자들에게 먹고 살 정도의 보수만을 주며 여타 것에 '마음 쓰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플라톤의 가족공유제와 사유재산 철폐는 kalipolis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해결책으로서 플라톤이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을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종현 교수의 <헬라스 사상의 심층>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서양정치철학사 1>을 참고하면 좋다] 주장하는 극렬 공산주의 색채[* 물론 그렇다고 플라톤이 공산주의자라고 본다면 이는 플라톤을 모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경우, 사유재산 철폐가 그들의 목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해체하고 공산사회라는 이상향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오히려 국가주의자라고 볼 정도로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처자공유제와 사유재산 철폐는 공산주의와는 다르게 목적이 아닌 올바른 나라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교육철학에서도 플라톤의 교육론을 배울 정도로 플라톤의 교육론은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공산주의가 자본가 계급이 더욱 쉽게 착취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교육과는 전혀 다르다. 플라톤의 교육은 결국 좋은 시민을 만들기 위함이고, 그 교육의 끝은 국가의 통치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플라톤이 공산주의자라는 의견은 플라톤을 오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현대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 같은 사람들은 플라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소수 의견이나마 플라톤을 공산주의를 통해 해석하려는 철학자들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를 띠고 있지만, 5권에서는 현대 시점에서 플라톤의 평가를 한층 더 격상시키고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부숴버린 다음, 그러면 아기와 여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도시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품고 있는 재능이나 소질은 퓌시스적으로 볼 때 차이가 없다.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으며, 남자와 여자에 구분이나 재능에 차등을 두는 것은 노모스, 인습적인 것이며 자연 즉 퓌시스에 반하는 것으로, 이상국가에서 그러한 노모스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플라톤을 단순히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플라톤은 <국가>편 3권에서 훌륭한 남성들은 여인을 모방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말했었고, 10권에서는 감정을 못 이겨 날뛰는 것은 여자나 그러는 것이라는 논지의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철학자 Juila Annas는 플라톤이 남성 본질주의자이며 공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여성을 수단시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가상실험에 파묻히던 소크라테스 일행은, 그건 그런 거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정의입니까?하는 글라우콘의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 지긋지긋한 이데아론이다. 정치철학 바로 위의 항목이 이데아론이긴 한데 여기서 연결되는 내용은 쓰여져 있지 않은데 이 문서에서 대강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참나무건 전나무건 소나무건 죽은 나무건 병 걸린 나무건 딱 보면 나무를 나무라고 알 수 있게 하는 나무다운 그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 애매한 개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이데아는 수학으로 표현가기가 대단히 편리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원이나 삼각형은 없지만 우리는 삼각형이나 원의 정의를 알 수가 있고 그를 통해 삼각형이나 원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 직각사각형의 정의 = 이데아라고 친다면 사각형 중에서 직각사각형의 이데아, 즉 정의(定義)에 들어맞는 건 직각사각형일 터이다. 국가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데아를 이렇게 대충 설명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이데아의 문제가 뭐냐면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약간 국가를 벗어나서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시장바닥 돌아다니면서 썰을 풀 때 개념정의에 대해 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얘기했던 모양이지만, 플라톤의 경우는 본인이 생각을 깊게 하다 보니 아님 학교를 차리고 강의를 하다 보니 애들이 곤란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데아가 있다고 한다면, 빅 빅 프라블럼이 생겨버리는데 이데아의 이데아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귀납적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용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모아서 필요하고 충분한 요소들만 쏙쏙 모아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용기, 용기의 이데아인 것이다! 이데아야말로 진짜다! 다른 것들은 다 허깨비, 가상, 2차적인 찌끄레기이고 오직 이데아만이 진정한 참이자 세상의 진리이자 불변하는 실체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할 때, 아니 플라톤 선생님, 그럼 이데아라는 애매한 개념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또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할 거고요, 또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 즉 무한퇴행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 그렇다면 그 이데아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까? 이데아와 우리 마음이나 지성 이런 것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는 아주 골아픈 형이상학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데아 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가 어느 정도 형이상학이긴 하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위의 이데아론 항목에서도 얘기했듯이 현대까지도 해결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전문 철학자들, 철학 역사에 남았으며 현대에도 천재로 이름 높은 난다긴다 하는 영미, 대륙의 철학자들끼리도 절찬리에 치고박고 있는 노답문제라 꺼무위키는 꺼무위키다운 주제를 파악하고 대강 넘어가 버리고 국가를 얘기하고 있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은 결국 정의를 얘기함에 있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앞서서 나온 퓌시스와 노모스 문제, 결국 정의롭게 잘 살기 위해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법의 관계에 대한 통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와 법 속에서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및 철학에 준거된 국가의 이상적 형태 및 나라에서 꾸준히 나라를 다스릴 철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형태 등등을 만드는 것에는 정의(正義, justice)의 이데아와 그것을 알고 있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또, 이 정의의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좋음(the good)의 이데아와 연결되어 있다, 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이다. 모든 이데아는 이 좋음의 이데아에서 비롯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에 결론을 낸다. 이데아 무한퇴행을 막는 이 이데아가 왜 좋음이냐면, 플라톤은 그에 대해 아름다움이나 호의와 같은 얘기를 한다. 약간 종교적이 되기도 하는데, 뭐 예를 들어서 말해 보자면 이 세상을 이루는 수학적 원리나 그에 따라 운행되는 천체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세상은 수학적이고 아름다운 원리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바로 절대자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의 신적인 조화에 가까운 세상의 여러 초월적인 현상이나 신비를 볼 때 신적인 존재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왜 호의가 아니라 악의를 내뿜겠으며, 수학이나 그에 기준을 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근원적인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왜 이성 좋은 거잖아 좋은 거. 뭐 글라우콘 패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소크라테스 밑에서 수련이나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논의를 하는 모양새를 볼 때 머리가 좋은 패거리들에 속하니 이런 이데아론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를 1빠따로 착 집어든 독자들은, 아무래도 국가만으로는 이데아에 대한 설명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게 뭔 소리야! 싶은 생각에 빠져들게 되며 납득하기 어렵다. ] 이들이 이렇게 이데아에 의한 정의의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그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이데아만이 정의이므로 실재 세계에서 완전히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회, 체제, 국가 등과 정의의 결합은 철학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데아를 아는 자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플라톤의 주장을 무시한다. 철학이 도시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가 아니라 강제적인 계도의 법칙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웃기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이 정치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들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민주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설득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기술이 필요하다. 철학은 옳기 때문에 수사학을 동원하면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크세노폰과는 달라서 초지일관 철학이 제일 행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철학자는 오직 철학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그 입장을 따를 때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공동체를 위해서 강제 동원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도시를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하기 싫어할 텐데, 보통 도시민들은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 패거리들이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나 보고 우끼우끼 우끼끼하면서 그것만이 진실이자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진짜 사물을 알고 있는 철학자들을 자신들의 안온함을 깨려고 헛소리하는 불한당 같은 패거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철학자들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면 들수록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깨부숴서 멍청하고 되먹잖은 부모라는 인간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지 말고 10살 정도 되면 무조건 국가에서 길러서 올바른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철학자들이 관우장비로 이뤄진 것도 아니고 판타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제시한 정의에 관한 어려운 물음들은 여전히 대단히 애매한 상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명확해진 상태이긴 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억지로, 혹은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것을 따라야 하는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불의에 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하면서 하나씩 알아보게 된다. 좋은 순서순으로,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말하자면 왕정이다.]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명예지상정체는 [[스파르타]]적인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상술했듯이 아테네가 패하며 플라톤이 스파르타 체제에 상당히 경도되었음을 뜻하며, 만년에 쓴 법률이나 정치가에서는 스파르타의 병크를 잘 목격했기 때문에 스파르타 욕도 많이 한다.] 과두정체(ὀλιγαρχία), 민주정체(δημοκρατία), 참주정체(τύραννος)로 구분된다.[* 헤시오도스의 다섯 시대 구분, 즉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의 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에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 왕정(monarchy) 혹은 최선자정(Aristocracy)이었던 국가는 곧 명예지상정(Timocracy)이 되었다가, [[과두정]](oligarchy)을 거쳐 [[민주정]](democracy)을 겪은 후 [[참주정]](tyranny)에 다다르게 되며, 이후에는 참주정이 무너지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게 된다고 보았다.] 최선자정체는 지성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명예지상정체는 명예, 과두정체는 돈, 민주정체는 모든 충동, 그리고 마지막 참주정체는 사악한 탐욕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정체)와 시민과 정의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정치철학적으로 타당한 얘기인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훗날 군주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군주의 도덕성과 정치환경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에는 학문도 그렇고 인간들의 생활상 자체가 공동생활과 분리되기 어려웠다.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선택되었던 예술, 종교, 정치 모두 도시국가의 시민적인 공동생활 속에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것이며, 현대처럼 개인의 예술이나 종교 등의 개념은 상정하기 어려웠다. 이와 더불어 소크라테스가 추구했으며 플라톤이 그 유산을 이어받은, 시민의 도덕성 함양이라는 테마 역시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사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곧 한 국가의 도덕적 올바름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이자 도덕적 올바름이 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부인하지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를 제시한 다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자신 또한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함을 알고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하나의 본으로써 이를 제시한 것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마음속에 이성 속에 이런 본을 지니고 정치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 역시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다. 흔히 공자는 '[[주나라]]'라는 '좋았던 과거'를 단순히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오해되곤 하는데, 사실 공자 사상에서 '주나라'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상의 주나라라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가공의 사회이지만,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사회'에 가깝다. 공자 역시도 주나라에 대한 정보는 당대에 이미 상당수 유실되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화편 국가에서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상사회이며, 대화편 법률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법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역이 아니다. 대화편 정치가는 테아이테토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순으로 지어진 저작이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수학자가 나오고, 소피스트에서는 당연히 소피스트가 나오고, 정치가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정치가가 주요 주제이다. 또한 작중 내용도 등장인물이나 시기가 이어지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다. 즉 플라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앎에 관련된 것을 논의해보고 정치와 다시 한 번 연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 철인왕은 여러 가지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철학 즉 진리를 모르고 그저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날뛰며 울부짓는 무리들을 위해 '이 바보들아! 저건 그림자잖아! 저건 버드나무의 잔가지가 바람에 일렁거리는 그림자고, 저건 여우가 도약하는 그림자 아냐!'하고 분별해서 가르칠 수 있는 그림자에 관한 지식, 즉 현실 정치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이상국가를 그리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 정치적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응 그건 철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하면서 넘어간 바 있다. 대화편 정치가에서 엘레아 사람은 그럼 과연 실제 정치가가 무엇인지에 관해 주장을 펼친다. 아마 당연히 엘레아 학파일 이 엘레아 사람은, 여러 가지 근본 원리나 기술로부터 정치의 기술까지 천천히 논의를 옮긴다. 그 결과 무릇 정치가니 왕이니 하는 것의 본질은 기술이나 앎으로서,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지위이건 간에 상관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기술이니까. 또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도시와 가정에는 차이가 없으며 정치가와 가장 사이에도 차이는 없다]]. 이와 같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치의 기술은, 실제 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힘, 무력 등과는 무관계하다. 힘이나 무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치를 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일지는 몰라도 실제 정치의 기술과는 무관계하다. 정치는 기술이되, 일종의 지식이나 앎에 속하는 기술로서, 그런 종류에 속하는 기술이 그러하듯이 명령을 내리는 기술이다. 다른 모든 명령을 내리는 기술처럼 정치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정치란 곧 인간을 출생시키고, 양육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물과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인과 야만인들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의술이나 성생활에 관련된 기술도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다. 정치술이 이들 기술과 차별화되는 점은, 인간과 동물의 특별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또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신화를 끌어들인다. 옛날에는 크로노스 시대였는데, 그때는 신들이 각기 동물들을 이끌고 이래라 저래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제우스 시대는 신이 그냥 인간들을 포함한 동물더러 알아서 하라고 놔둔 시대라는 것이다. 옛날 크로노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가 시행되던 시대였으나[* 그렇다고 크로노스 시대가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데, 왜냐면 절대적 공유제와 신의 인도로는 충분치 않고 철학을 해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진짜 지독한 인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현재 제우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도 불가능하고 불의와 무질서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인간들끼리 알아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즉, 국가에서 얘기했던 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절대적 공유제 그런 거 신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알아들었냐. 이렇게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정치는 이렇게 정치가나 왕이 신일 경우와 신이 아닐 경우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정치가나 왕의 지배가 합법적인가, 올바른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과연 피지배자들이 동의했는가, 동의하지 않았는가로 구본된다. 엘레아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정치가의 기술에 대해서 검토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 진정한 정치가들의 기술과 자웅을 겨루고 있는 기술은 바로 소피스트 모리배들의 기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절찬 활용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지배는 세 가지고 나뉘는데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로 나뉜다. 이 세 가지 지배는 앞서 얘기했듯 피지배자들의 동의했는가, 아닌가 두 가지로 인해 6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과 금권정, 민주정으로 나뉜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하의 민주정에서 자유와 법의 구분에 있어서 주요 쟁점은 소수의 유산계층이 다수의 빈민계급에 의한 지배에 대해 동의하느냐 마느냐인데, 플라톤은 유산계층이 동의하나 마나 별 차이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플라톤의 정체는 1) 왕정 2) 참주정 3) 귀족정 4) 과두정 5) (강압하는) 민주정 6) (동의하는) 민주정 이렇게 6가지의 정치이다. 이 6가지 정체는 올바른 통치의 기술인 철학과 무관계하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도 큰 신빙성이나 공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큰둥하다. 플라톤은 이를 자신이 주구장창 사용하는 의술의 예시를 들면서 정당화한다. 의사가 진정한 의술의 기술을 활용하는 한 환자가 동의하건 말건 환자의 신체를 지지고 볶건 간에 의사는 옳은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의 비유를 웃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지배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쨌건 공동체에 최선의 선택을 통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피지배자들이 동의를 해주건 말건, 불법을 자행하건 말건, 사람들을 조지건 말건 외국인을 어떻게 쓰건 상관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키보드 워리어 영혼은 법 없는 지배를 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엘레아인의 주장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엘레아인은 침착하게 소크라테스를 상대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현대사회에서조차 법 조항의 미비로 인해 뻔히 보이는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불의에 속 끓는 일이 제법 많다. 그런데 이런 고대 희랍 사회에서 돌때기에 글자 좀 새겨넣고 '에헴! 이것이야말로 우리 도시국가가 앞으로 준수해야 할 신성한 법률이라니까!'하고 뻐기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일일까? 각 사건이나 상황은 항상 건 바이 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시대와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데 돌에 법률을 새겨놓고 뻐기는 일이란 과연? 현행 법률들이 사회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성문이건 불문이건 간에 현행 법률이란 물건들을 살펴 보면 모두가 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신성을 지닌 사람을 마치 짐승 무데기인 것마냥 취급한다.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이유이고, 법이란 것은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마저 제약하기 때문에 나쁘다. 실제로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유연하고 정확하게 각 상황과 사건에 맞춰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이 있다면, 동굴 속에서 우끼끼끽~ 우끼이후~ 하는 무리들이 법률에 비춰 진정한 지배에 계속 토를 달면서 방해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동굴 속의 무지한 무리들은 눈깔이 없기에 현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고, 고맙게도 현자가 그들을 다스려준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계속 의심할 것이다. 국가에서도 얘기되는 바지만 무지몽매한 무리들은 현행법을 떠받들면서 현자에게도 현행법의 절대성을 인정하길 바라고, 현자가 그를 무시하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재판정에 보내서 요단강 저 너머로 현자를 보내버릴 것이다. 현행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백치 아다다들은 어떤 변화나 개정, 토론을 원하지 않으므로, 현자는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지 굳이 대가리 터진 원숭이들을 다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법의 지배는 인정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법도 현자도 지배하지 않을 경우 욕심 많고 사악한 야심가가 국가를 다스리며 민중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도 현행법이 아무리 병신 같을지라도 존경을 표해야 한다. 아니면 모가지가 뽑힐 테니까.[* 이 부분은 아마 플라톤의 인식이 변화한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틑 철학자가 동굴에서 벗어나 진정한 앎을 인식한 연후 원숭이들이 들끓는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철학자는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원숭이 무리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가에서는 더럽지만 그냥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참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법의 지배는 아무리 쓰레기 같은 법이라도 일단은 이성적 고찰이 조금이나마 섞여 있을 것이기에 무법천지보다는 낫다. 또한 실제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참주]] 같은 놈들이 그 법을 지 맘대로 바꾸면 그것은 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근거해서 각 정체들의 순위가 매겨진다. 당연히 법이 없는 정부보다 법을 따르는 정부가 나으며, 개중에서도 법을 따르는 민주정이 짱이다. 물론 제대로 된 통치의 기술을 가진 정치가나 왕은 법을 맘대로 바꿔도 상관없지만. 엘레아인은 현실적으로 자기자신은 현자가 만든 법이 존재한다면 똥멍청이들이 나라를 지배해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엘레아인은 통치의 특별한 기술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작중에 뜨개질 기술을 예시로 들기도 했고, 인간을 출생시키고 보육시키는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통치자는 균형 잡힌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각 집안과 집안을 이어줘야 한다. 어떤 한 기운이 지나친 집은 반대편 기운이 지나친 집과 맺어줘서 도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각 시민 개인의 기질을 균형잡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와 같은 마담뚜의 기술이 바로 왕의 특성이다. [[전륜성왕|즉 왕은 인간 무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물론 철학자는 이런 똥대가리 대중들과는 상관 없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