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톤 (문단 편집) == 평가 == >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던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김재홍 번역 해제를 통해 간접 발췌.] >플라톤은 당대의 가장 지혜롭고 가장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가 발언하는 방식에 의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대단한 것이 되었고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사소한 얘기가 되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각별히 흠모하던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는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한편 피타고라스는 그리스철학, 그때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리스철학에 만족하지 않던 차에 시로스라는 곳의 페레키데스의 토론에 매료되어 영혼은 불사불멸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다음에 멀리 또 널리 여행하면서 많은 현자들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윤리 도덕에 관해서 품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정교함이라는 세련미에 자연 사물과 신적 사물에 관한 전문 지식을 첨가하였으며, 이 지식은 내가 방금 열거한 인물들에게서 부지런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거기다 철학의 여러 분야들의 훈련 내지 조정의 역할을 하는 변증론{{{-2 辨證論}}}을 덧붙였으니 변증론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가 지혜이거나 그것 없이는 지혜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철학을 완전한 학문으로 집대성하였다는데 지금은 그것을 토론할 시간이 아니다. 여기서는 내가 제시하려는 말로 넉넉하다. 즉, 플라톤은 세계가 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나는 가지계{{{-2 可知界}}}로서 진리가 항존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계{{{-2 感覺界}}}로서 우리가 시각이나 촉각으로 감지하는 세계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저 세계는 참세계이고 이 세계는 진리와 근사한 세계 혹은 저 세계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따라서 전자로부터는 영혼이 자기를 인식하는 가운데 진리가 다듬어지고 청아해지는 데 비해서, 후자로부터는 어리석은 자들의 정신 속에 지식 아닌 억견{{{-2 臆見}}}이 생성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은 시민덕{{{-2 市民德}}}이라고 일컫는 덕성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진리의 근사치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다. 저 덕성들은 또 다른 참된 덕성의 근사치라고 할 만하고 소수의 지혜로운 사람에게가 아니면 알려져 있지 않다. >---- >[[아우구스티누스]], 《아카데미아학파 반박》 제3권 17.37. 성염 번역. >플라톤은 벗이요, 진리는 더한 벗이라. >Am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tas. >---- >라틴어 격언[* 이는 보통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존 저작 가운데 이러한 말이 직접 나타나는 곳은 없다. 다만 비슷한 취지의 말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1096a11–15에 보인다. 아무튼 플라톤에 대한 서양철학계의 경의와 대결 의식, 그리고 철학함의 근본 자세까지 압축적으로 표현한 명언으로 자주 인용된다.] >경쾌한 비둘기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공기를 헤치고 날면서 공기의 저항을 느낄 때, 공기가 없는 공간에서는 훨씬 더 잘 날 줄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감성세계가 지성에게 그렇게 좁은 경계를 쳐놓는다는 이유로 감성세계를 떠나, 관념의 날개에 의탁해서 피안의 세계로, 곧 순수 지성의 허공으로 감히 날아들어 갔다. 이 때 그는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는, 그가 말하자면 거기에 의지해서 그 지점에서 지성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그의 힘을 쓸 수 있는 토대인 버팀목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길도 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변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건축물을 완성해 놓고는 그 후에 가서야 비로소 그 기초가 잘 놓였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흔한 운명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8 이하[* 임마누엘 칸트 저,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전 2권), 서울: 아카넷, 2006, 220-221쪽.][*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를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높은 확률로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플라톤과 칸트이다. 칸트는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초험적(transzendent: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 전통과 정면 대결하여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플라톤급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랠프 월도 에머슨]]]]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극렬 플라톤까인 동시에 플라톤빠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의 전집 첫 권의 분량 대부분이 대학 교수 시절 열중했던 플라톤 연구 내용이다.], <<비극의 탄생>> Ⅲ 3:207 >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고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자들이 그의 글에서 의심스럽게 추출한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글에 흩어져 있는 일반적인 개념들이 얼마나 풍부하게 해석되는지 암시하고자 이를 언급한 것이다. >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s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I do not mean the systematic scheme of thought which scholars have doubtfully extracted from his writings. I allude to the wealth of general ideas scattered through them.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저,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 AN ESSAY IN COSMOLOGY』, 2nd, New York, The Free Press, 1979, p.39. > 어쩌면 '철학'은 플라톤의 방법으로 추구하는 탐구 활동의 총합으로 정의될지도 모른다. >----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러셀은 극렬 플라톤까인데도 이런 평을 내렸다.] > 플라톤주의를 모르는 사람은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법이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 『개념, 시간, 그리고 담론』[* 마크 릴라 저, 서유경 역,『분별 없는 열정』, 서울: 필로소픽, 2018 p.154에서 재인용.]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보다 [[피타고라스]]나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철학의 내용적인 면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또 나무위키 치고는 지나치게 과감한 시도이다.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플라톤 탐구 방법의 기본을 이루는 만큼 소크라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 사회에서 문답법을 통해 정확한 덕과 정의를 찾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동기 면에서는 정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뻑하면 체육선생, 제화공, 의사, 목수 등을 예시로 들면서 일반 기술과 철학 기술을 동치로 놓으려는 시각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하고 보는 편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것은 가짜고, 불변하는 초월적 존재만이 진짜 존재(실재)하는 것이라는 존재론을 플라톤이 계승했고, 이것이 향후 서양철학과 중세신학의 기본 틀이 되었다. 중세 초기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의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더 정확히는 기독교가 서양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적극 수용한 것. 그러나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고[* 기독교에서 신(야훼)과 일치시킨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세상을 무에서 만든 것이 아닌, 이미 있던 물질들을 설계서에 따라 조합한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완전히 무에서부터 설계, 조합까지 그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에서는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되었다.], 이는 후에 그노시아 등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일반적 입장과 대립되는 이단의 출현을 야기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20세기 성서학에서는 니체 시절보다는, 신약 성서에서 헬라스 철학의 영향을 읽어내는데 회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플라톤주의의 연장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가령 바울로의 경우 헬라스 철학에 대한 교양을 갖추고는 있지만, 논증 방식과 사유 체계는 핼라스 철학자보다는 유다인의 미드라쉬에 가깝다. 헬라스 철학에 대한 교양을 넘어, 본격 헬라스 철학의 길을 걷는 신학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지난 2000년 동안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 2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항상 첫 손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생각, 관념을 지칭하는 idea, 이상을 지칭하는 ideal등의 단어들 모두가 이데아를 어원으로 두고있다.]론을 통해 서양철학사를 상징하다시피 하는 세부철학인 관념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념론을 신(神)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 중세철학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 근대철학이며, 부정하려 하는 것이 현대철학이다. 때문에 그의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이뤄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절대 관념론이 아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현상의 실재와 이데아의 실재를 모두 인정하는 이원론자이기 때문에 관념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데아 개념이 관념론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해도 이 문단처럼 단순히 도식화해서는 안 된다. 또한 중세, 근대, 현대 철학을 관념론에 대한 입장으로 단순화하는 서술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당장 근대 초기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인 로크, 버클리, 흄 중 버클리만이 관념론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