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로리다 (문단 편집) == 역사 == 대략 14000년전부터 초창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부 지역은 [[미시시피 문화]]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근대]] 초기에 [[스페인인]]과 접촉했을 때 35만명의 인구에 100여개 이상의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다양하게 추정되기도 한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플로리다를 탐험했고 1521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세미놀족 인디언에 의한 반복 공격으로 쫓겨났다. 이후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가 1528년에 플로리다 서부를 탐험했고 1539년 [[에르난도 데 소토]]가 플로리다를 탐험하고 원주민 세미놀 및 [[체로키]] 부족과 전투를 해서 승리했다. 1559년 8월 스페인 탐험가 트리스탄 데 루나 이 아렐라노는 오추세 만[* 현 북부 펜사콜라 만]에 있는 [[펜사콜라]]에 최초의 정착지인 산타마리아 데 오추세[* 현재는 펜사콜라 역사 지구로 보존되고 있다. 펜사콜라가 오래된 북부 스페인 도시 중 하나다.]를 건설했지만 2년 만에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리고는 새 거점을 마련한 곳이 미국 동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산아구스틴으로 현재의 세인트 어거스틴이다. 세인트 어거스틴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한편 [[프랑스 왕국|프랑스]]도 이곳에 관심을 가져 [[1564년]] [[잭슨빌]]에 캐롤라인 요새를 건설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 다음해 [[1565년]]에는 세인트 어거스틴에 새 스페인 식민지가 세워젔다. 이 곳이 미국 동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스페인의 새 거점이었다. 이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플로리다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젔다가 결국 스페인이 완전히 손에 넣고 프랑스는 철수했으며 잭슨빌의 캐롤라인 요새도 스페인 해군이 인수했다. 그리고 [[1586년]]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의 해적왕인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습격을 가해 세인트 오거스틴을 불태웠다. 스페인의 [[예수회]] 소속 [[가톨릭]] 전도사들은 이곳을 오지 선교를 위한 기지로 사용하였다. 한편 세인트 오거스틴은 1656년의 반란과 1659년의 전염병으로 황폐화되었다. 이후 계속된 해적의 습격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스페인의 세력은 늘어갔다. 17세기에 북부 버지니아 쪽과 캐롤라이나에서 [[영국인|잉글랜드인]] 이민자들이 슬금슬금 내려와서 플로리다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3파전으로 변했다. 프랑스는 루이지애나에서 플로리다 서부로 밀고 들어왔고 영국은 북부에서 밀고 들어왔다. 이 각축장 와중에 많은 원주민 부족이 휩쓸려 희생당했다. 결국 프랑스는 스페인 땅을 뺏는 걸 포기하고 대신 스페인에서 넘겨받은 루이지애나에 집중하며 [[앨라배마]] 남부 멕시코만 연안지역과 [[미시시피]] 빌록시, 파스카굴라 등이 스페인 세력권에 흡수되고 영국은 조지아 남부에서 기회만을 노린다. 한편 [[영국]]은 [[7년 전쟁]] 와중에 스페인 식민지를 대거 점령해 [[쿠바]] [[아바나]],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했다. 그 중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인들이 수비대를 조직해 상륙한 [[영국 해군]]을 쫓아냈다. 그러다가 [[7년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쿠바]] [[아바나]]와 [[필리핀]] [[마닐라]] 등 점령지를 돌려주는 댓가로 플로리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영국의 플로리다 통치는 강압적이었고 이때 개척민들과 흑인 노예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많이 들어왔다.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독립하고 그 동맹이었던 스페인은 영국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되찾았다. 스페인의 2차 지배 시기는 개척민을 끌어오기 위해 토지 무상분배를 시행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 개척자들이 들어왔다. 유럽인 개척자들은 [[스페인인]]들과 [[이탈리아인]]은 물론 [[독일인]]도 흔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인들은 주로 남부, 독일인은 북부와 중부에 정착했다. 또 이웃 남부 노예주들에서 탈주노예들이 흘러들어왔고 이들을 받아들인 [[문명화된 다섯 부족|세미놀 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미국과 투쟁을 하는 근거지도 플로리다였다. 그리고 야금야금 [[미국인]] 개척자들과 [[영국인]]도 조지아에서 유입되기 시작해 어느새 북부 플로리다에선 영미인 개척자들이 다수가 되었다. 이 때 미국은 도망친 노예를 잡기 위해 노예들을 숨겨주던 세미놀족과 충돌했고 스페인에게 원주민 부족들을 통제할 것을 요구했으나 스페인의 지배력은 미약했다. 결국 영국계 개척민들과 미국인 개척자들의 불만이 쌓여 1810년 서부 플로리다가 서부 플로리다 자유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810년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은 서부 플로리다를 [[병합]]하고 이를 [[루이지애나 매입]]의 일부로 선언했다. 스페인은 항의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토도 정신없고 플로리다 북부에는 스페인계 주민도 많지 않아 사실상 이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한편 세미놀족이 미국 영토인 [[조지아주|조지아]]를 공격했고 이는 스페인의 후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화가 난 미국 정부는 세미놀족의 말살을 선포하고 [[앤드루 잭슨]]을 보내 [[제1차 세미놀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완승을 거둬 플로리다 동부를 점령했다. 1819년 애덤스-오니스 조약이 맺어젔고 2년 뒤 발효되었다. 결국 [[1821년]] 스페인은 더이상 통치권을 유지하기 힘든 플로리다를 포기하고 500만 달러를 받고 정식으로 [[펜사콜라]]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플로리다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이후 플로리다는 미국의 준주가 되었다. 남부 지역에 살던 스페인인들은 고스란히 미국 시민으로 흡수되었으며 북부는 이미 미국인들 천지였고 여기에 미국인들이 데려온 흑인 노예들까지 넘쳐흘렀다. 어차피 사는 지역이 달라 기존 스페인인-이탈리아인 이주민들과 미국인 개척자 간 갈등은 없었다. 문제는 미국의 통치를 전면거부한 원주민 부족인 세미놀족이었다. 1835년 [[미국인]] 개척자들과 세미놀족의 갈등은 극에 이르러 제2차 세미놀 전쟁이 터젔다. 1845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에서 미국은 초토화 전술을 써서 세미놀족과 싸웠고 천문학적인 경비를 소모했다. 세미놀족은 [[게릴라]] 전술로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미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꺾이고 상당수의 부족인들이 희생되고 항복했다. 상당수의 세미놀족이 강제로 남서부의 사막지대 내 보호구역으로 이주당했고 애버글레이즈에서 버티던 소수의 세미놀족은 원주민 보호구역에 남아있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이후 제3차 세미놀 전쟁으로 인해 [[오클라호마 주]]로 남아있던 부족의 상당수도 이주당했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극소수의 세미놀족과 오클라호마에서 돌아온 세미놀족들이 연방 정부와 협상을 해서 보호구역을 재건해 플로리다의 세미놀족들은 명맥을 이어 오늘날에 이른다.] [[1845년]] 플로리다는 주로 승격했고 [[남북전쟁]]때는 남군의 일원으로 북군과 싸웠다. 플로리다도 엄연한 노예주였기에 남군에 가담했으나 전력이 허약했다. 플로리다는 주요 해상 통행로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북군으로서는 탐난 곳이었고 남군은 삼면이 바다이고 항구를 낀 이 지역을 지켜야 할 해군력이 아주 허약하여 방어력도 형편없었다. 결국 북군 해군이 플로리다의 무역항을 봉쇄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령했다. 이후 남북전쟁이 끝나고 플로리다는 계속된 이주와 관광지 개발로 미국의 휴양지로 이름을 떨쳤다. [[1920년대]]에는 [[1920년대 플로리다 부동산 개발 붐]]이 일어나 투자자들의 대규모 부동산 투기가 이뤄졌었고 이를 통해 늪지대였던 [[에버글레이즈]]에 수많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1925년 마이애미 태풍]]과 [[오키초비(태풍)|태풍 오키초비]] 등으로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되면서 [[버블경제]] 또한 빠르게 꺼져갔다. 뒤이어 일어난 [[대공황]]으로 인해 피해 복구가 더뎌졌다. [[1960년대]]에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아 흑인들의 항의 시위와 이를 거부하는 백인들간의 갈등과 린치가 일어났다. 이러한 홍역을 치르고 나서 [[1962년]]에는 [[케네디 우주센터]]가 들어서 미국 우주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쿠바 혁명]]으로 망명한 [[쿠바]]계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대거 정착했고 스페인계 후손들도 더 많아젔다. 이들은 대부분 스페인계 혈통이 많은 남부 플로리다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이들 중 [[뉴욕]]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뉴욕은 동부의 대도시이자 미국 최대도시로 기회가 더 많았기에 원래 쿠바의 부유층인 이들에겐 비즈니스에 좋은 곳일수밖에 없었다. 쿠바 이주민들은 타 히스패닉 그룹과 달리 스페인 혈통 특권층 의식이 강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19세기 초반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데 비해 쿠바는 무려 반세기가 넘는 [[미국-스페인 전쟁|19세기 후반]]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자연스럽게 본국의 영향을 더 오래받았다.], 상당수가 바티스타 정권 당시 쿠바의 상류층들이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서 다른 히스패닉 그룹과 섞이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살았다. 그러다 [[1970년대]]~[[1980년대]]에 [[마이애미]] 항구를 통해서, 같은 [[카리브해]]를 낀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기승을 부리던 [[마약 카르텔]]들이 본격적으로 [[코카인]] 밀수를 하기 시작해 마약과 [[갱]]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또한 2013년 차베스 정권 말기부터 시작된 베네수엘라의 경제파탄과 이후 들어선 마두로 정권의 철권통치를 피해 이민 온 베네수엘라인들도 플로리다에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플로리다는 따뜻한 기후와 휴양 관광지 개발로 인해 [[은퇴]]한 사람들의 낙원으로 불리며 미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2020년대]]부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퇴임 후 재기를 위한 새 거점으로 낙점되고 반공성향이 강한 [[베네수엘라]] 이주민들과 [[스페인계 미국인]]의 일부로 원래 쿠바의 부농이던 쿠바 백인 이주민들이 많아서 성향 자체가 리버럴한 [[멕시코계 미국인]]이 많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과는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