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식물) (문단 편집) == 역사 ==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실로 [[조(식물)|조]], [[수수]], [[콩]]과 함께 [[석기시대|신석기 시대]] 때 제사장, 족장 같은 높은 사람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주로 재배하던 작물이었다고 한다.[* 제사장, 족장같은 높은 사람들은 주로 [[쌀]]을 먹었다.] 피는 환경적응성이 매우 뛰어나 척박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피농사는 벼농사보다 쉬웠기에 먼저 재배되었고, 벼농사는 많은 인력이 관개수로 작업에 투입될 수 있던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벼]]는 [[청동기]]시대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었으나 최근에 [[경기도]] [[고양시]]에서 신석기시대의 벼 재배 관련 유적과 유물이 [[http://blog.naver.com/yjhedc/220207717752|발견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관련 대표적 유적. [[신라]]시대 [[함안군]] 성산산성에서도 다른 지역에서 수확한 피를 운송시키면서 [[꼬리표]]로 사용했던 [[목간]]이 나오는 등 식량으로서 유통되던 물품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오곡 중 하나[* [[기장(식물)|기장]], [[보리]], [[쌀]], [[콩]], 피. 현재는 피가 빠지고 [[조(식물)|조]]가 오곡에 들어간다.]로 꼽힐 정도로 널리 재배했다. 맛이 별로이기 때문에 오늘날 수경문화권에서 피를 주식으로 재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 나라도 조선시대쯤 되면 이미 '피'는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나 먹는 [[구황작물]]로나 취급했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기운이 없고 비실비실한 사람에게 '피죽도 못 얻어먹었냐?'고 하는 것이 그 예시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널리 재배했지만, 식량증산정책의 일환으로 벼 재배를 정부 차원에서 권장하고 보조하면서 식용작물로서의 피 재배는 한국 내에서 사라졌다. [[일본]] [[에도 시대]]의 농서에는 아예 "[[저 새는 해로운 새다|저 잡초는 가장 해로운 잡초다!]]"라고 했을 정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89934&cid=42893&categoryId=428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