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렌체 (문단 편집) == 역사 == 피렌체는 기원전 8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아르노 강가에 자신의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를 세울 때 "두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플루엔티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명칭이 후에 "플로렌티아"로 바뀌었다.[* 현재 이탈리아어 명칭 피렌체는, Florentia(플로렌티아) → Fiorenza(피오렌차) - Firenze(피렌체) 순으로 발음이 변형된 것이다.] 그러나 술라의 퇴역병들은 곧 도시를 방기하여 이때의 식민지 건설은 실패했고,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새로 퇴역병을 이주시켜 건설한 것이 현재 피렌체의 시작이다. 이후 피렌체는 4세기 초 주교좌가 되었고 [[서로마 제국]] 멸망과 10세기를 거쳤다. 11세기부터 상업과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국력이 발전, 몰락한 항구 도시 [[피사]]를 내륙 도시인 자신들의 외항으로 접수하고,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이탈리아의 곡물 무역권을 얻어내며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152년 도시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252년에는 7세기 이래 유럽 최초의 금화 [[피오리노]] 도로 fiorino d'oro(영어로는 [[플로린]] 금화라고 부른다)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13세기에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중 누구 편을 들 것인가를 두고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양 집단이 사실상의 내전을 벌였다.[* 이런 양상은 피렌체를 넘어선 전 이탈리아에서 벌어졌고, 이 난리통에 휩쓸린 [[단테]]는 칩거해 있는 동안 유명한 [[신곡]]을 썼다.] 이후로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정치 방식이 본래의 코무네(Commune, 지방 자치)에서 점차 한 가문의 지도자가 "시뇨리아(Signoria)"라는 칭호를 달고 지배하는 구도로 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여러 유력가문이 정쟁을 벌이다 1434년부터 [[메디치 가문]]이 완전히 정계를 장악했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지배 시기는 사실상 피렌체의 최전성기로, 메디치 가의 강력한 후원 덕에 무수한 학자와 예술인의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메디치 가가 자랑하는 정예군 '''검은 군단(Bande Nere)''' 등의 강력한 군사력 또한 위용을 뽐냈다. 더구나 이 시기는 피렌체뿐 아니라 인근의 [[밀라노]], [[제노바]], [[베네치아]] 등 북이탈리아 전체가 [[흑사병]]을 견뎌낸 이후의 산업의 호황과 각지에서 몰려든 인재들의 역량에 힘입어 눈부신 발전상을 구가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북쪽의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가 내부를 추스르고 강대국으로 변모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피렌체를 포함해 각 도시국가별로 제각각 방위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유럽 본토의 상황이 혼란스러웠으나, 그 양상이 두 강대국 체제로 정리되면서 불똥은 사이에 낀 이탈리아로 옮겨 붙었다. 초기에는 그래도 양국에 적당히 옮겨 붙으며 실리를 취할 수 있었으나,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 [[저지대 국가]]를 필두[* 이미 카를 5세 치세 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자신의 영지에서밖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런데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의 기반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1521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트]]에게 떼어주면서 카를 5세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뿐이었다.]로 서유럽을 아우르는 유럽 최대 패자로 부상하면서 힘의 균형이 완전히 기울어진다. 이에 당황한 [[메디치 가문]]은 [[카를 5세]]를 견제하고자 프랑스 편에 붙었으나, 양측이 전면적으로 격돌한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에 증원해 준 검은 군단이 카를 5세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무렵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공화정의 [[비정규직]] 서기관으로 일하다 밀려난 뒤(유력 가문 소속도 아니었고 대학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내내 불안한 신분이었다)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에 헌상하였으나 결국 공직에 돌아가진 못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꺾은 카를 5세는 [[로마]]까지 침공하여 [[사코 디 로마|관광 보내]] 이탈리아에서의 적대 세력을 완전히 찍어 눌렀고, 즉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복귀시켰다. 하지만 교황과 화해한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을 복위시켰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나중에 [[앙리 2세]]로 즉위하는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 왕자에게 정략적으로 시집 보낸 보람도 없이 상공업마저 독일 산업권에 많이 빼앗겨 피렌체도 메디치 가문과 함께 몰락,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계속 피렌체 공국의 주인으로 남았고 오히려 주변 지역들을 흡수하여 1569년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웠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이 끝내 단절되자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지방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게 되었다.[*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기 위해 [[로렌 공국]]을 포기한 [[프란츠 1세|프란츠 슈테판]]이 죽으면서 토스카나 대공국은 차남 [[레오폴트 2세|레오폴트]]에게 상속되었고, 레오폴트는 형 [[요제프 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하러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돌아가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맏아들 [[프란츠 2세|프란츠]]에게 상속하기로 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차남 [[페르디난도 3세|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괴뢰국 [[에트루리아 왕국]]에 병합되어 [[파르마 공국]]을 빼앗긴 [[부르봉 왕조|부르봉-파르마 가문]]이 들어서고, [[페르디난도 3세]]는 [[잘츠부르크]]를 거쳐 [[뷔르츠부르크]]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빈 체제]]가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복권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벌어져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손잡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개입과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토스카나 주민들의 봉기로 [[합스부르크 가문]]을 몰아냈고,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구성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류하였다. 1865년 잠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행정구역)|수도]]가 되었다가[* [[이탈리아 왕국]] 초창기에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수도였던 [[토리노]]가 수도였으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체결된 토리노 조약에 따라 [[사보이아 가문]]이 토리노에서 물러나기로 하면서 당시에는 아직 탈환하지 못했으나 [[로마]]와 가깝고 위치도 중부였던 피렌체로 [[천도]]했다. 마침 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외가와 처가가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이어서 어린 시절을 피렌체에서 보내기도 했다.] 1871년 수도의 지위를 [[로마]]에 내어 준 후 현재에 이른다. 그래도 잠시 수도로 있을 때에 구축된 인프라 덕분에, 단순한 지방도시로 남을 뻔한 이곳이 관광도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 북이탈리아에서 [[영국군]]과 싸우던 [[독일 국방군]]은 피렌체에서 퇴각하면서 모든 다리를 끊으려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베키오 다리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포격을 거의 받지 않은 도시라 다행스럽게도 많은 문화유적들이 온전한 채로 남을 수 있었다. 1966년 11월 아르노 강이 범람하면서 많은 문화 유적, 유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은 오랜 기간 동안의 작업을 거쳐 복원에 성공하였으나 일부는 영원히 소실되었다. 현재 인구는 38만여 명으로, 거대한 [[돔#s-1]]을 가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우피치 미술관]] 등이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관광 도시다. [[세리에 A]] 소속 [[축구]] 팀인 [[ACF 피오렌티나]]가 이곳을 연고로 삼고 있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답게 많은 [[명품]] 패션 하우스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구찌]], [[페라가모]], [[파네라이]], [[토즈(패션 브랜드)|토즈]][* ACF 피오렌티나의 구단주인 델라 발레 가문이 소유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등의 브랜드가 이 도시에서 시작한 브랜드이다.[* 피렌체에서 한 시간 거리 정도에 [[프라다]] 생산 공장이 있어 직접 가면 국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어서 오늘도 많은 여성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도시 전체가 명품관 느낌이 날 정도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신주쿠]]보다 인파가 많다고 느껴질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