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휘 (문단 편집) ==== 조선 ====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백성들의 언어체계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잘 안 쓰는 글자,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지었기에 웬만해서는 자동으로 피휘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거나 직계가 끊겨 방계로 왕위를 얻은 왕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예외적인 사례로 [[인조]]. [[선조(조선)|선조]]가 아껴서 처음부터 외자로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리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어서 과거 시험 등에서 '''혹시라도''' 왕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당장 낙방에 곤장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참고로 당대의 운서나 자전, 경서들은 성인의 말씀이기에 문장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피휘 글자들에 따로 테두리를 쳐서 주의토록 되어있았다. >선조조(宣祖朝)에 역대 선왕의 어휘(御諱)를 대용하는 글자를 제정하였다. 도조(度祖)의 휘는 ‘춘(椿)’인데 ‘충(冲)’ 자로 대용하였고, 태종의 휘는 두 자 이름이라 어느 한 자만을 휘피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쓰는 글자는 없었으며, 세종의 휘는 ‘도(裪)’인데 ‘휼(𥛯)’ 자로 대용하였으며, 문종의 휘는 ‘향(珦)’인데 ‘임(琳)[* 여담으로 문종의 친동생인 [[평원대군]]의 이름이다.]’ 자로 대용하였으며, 세조의 휘는 ‘유(瑈)’인데 ‘이(理)’ 자로 대신하였으며, 덕종의 휘는 ‘장(璋)’인데 ‘명(明)’ 자로 대신하였으며, 예종의 휘는 ‘황(晄)’인데 ‘광(光)’ 자로 대신하였으며, 성종의 휘는 ‘혈(娎)’인데 ‘흔(欣)’ 자로 대신하였으며, 중종의 휘는 ‘역(懌)’인데 ‘예(豫)’ 자로 대신하였으며, 인종ㆍ명종의 휘는 드물고 괴벽한 글자이므로 대신 쓰는 글자가 없었다. >---- >《[[연려실기술]]》 한자를 어쩔 수 없이 써야 했거나 그 뜻을 써야할 경우가 부득이 하게 있었다면 위 [[연려실기술]]에서 언급한 것처럼 뜻이 같은 다른 한자를 쓰거나 아예 그 한자의 발음으로 대체했다. 경전에 부득이하게 피휘해야하는 한자가 적혀 있을 때는 이렇게 대체 한자로 치환해서 읽거나 '모(某)'로 바꿔 읽곤 했다. 예를 들어 경서에 태조 이성계의 개명한 휘인 '단(旦)'이란 글자가 나오면, 뜻이 같은 다른 문자 朝를 따라 됴[조]로 읽었다. *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초대 왕이 되어서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한자인 이룰 '성(成)'과 자주 사용되는 계수나무 '계(桂)'가 '''[[경술국치|조선 망할 때까지]]''' 금기시될 뻔했지만 본인이 말년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고,[* 참고로 이 이단(李旦)이라는 이름은 [[당예종]]의 이름과 완전히 겹친다. 때문에 [[구당서|구]], [[신당서]]를 간행할 때 곤란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구, 신당서를 조선에서 간행하면서 당예종의 이름을 피휘해 표기한 예가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이성계의 아들 [[정종(조선)|정종]]도 방과(芳果)라는 이름자가 성(成)자 못지않게 쓰이는 한자라서 경(曔)으로 개명했다.[* 게다가 정종의 형제들(나아가 정종과 같은 항렬의 '''대부분의 전주 이씨 남자들''')이 모두 이름에 '방(芳)'이 들어가있으니 정종이 개명하지 않았으면 형제들도 개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다. [[북송|송나라]] [[송태조|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자 동생인 [[태종(송)|태종]] 조광의(趙匡義)는 이름을 광의(光義)로 바꾸었다. (태종은 즉위 후에 다시 경(炅)으로 개명했다.) ] 이때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이라고 병립되어 쓰이던 지명이 그냥 [[아차산]]으로만 태조의 휘를 피휘해 쓰이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예외적으로 [[태종(조선)|태종]]의 경우는 지명에 많이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생활 필수 한자 중 하나인 멀 '원(遠)'인데 '''죽을 때까지 이름이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위의 연려실기술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芳과 遠을 따로 쓰는 경우에는 피휘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실록에도 이 두 글자는 멀쩡히 잘 등장한다.[*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 실록에서 꽃다울 방 자는 총 1156회, 멀 원 자는 총 23896회 등장한다. 특히 '원' 자는 태종실록에만 약 200건, 세종실록에는 1200건이 넘게 나온다.] 물론 '방원(芳遠)'은 철저하게 피휘되었으며, 휘를 써야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정석은 이게 맞으며 피휘에 대한 규정이 나와있는 [[예기]] 단궁(檀弓) 하(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이름이 두 글자인 경우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휘하지 않는다'''(二名不偏諱, 夫子之母名徵在, 言在不稱徵, 言徵不稱在)고 했다. 즉, 피휘 규정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냐는 그때 그때 정하기 나름이었던 것. 심하게 피휘할 때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이 비슷해도 금지하기도 하지만,[* 피휘 문제는 아니긴 했지만 [[문자의 옥]] 중 가장 혹독했던 [[건륭제]] 시기에는 회명시집이라는 이름의 시집을 펴낸 사람이 회'''명'''의 명이 명나라의 명과 음이 같다며 사형당한 일도 벌어졌다. 단 이는 건륭제기 워낙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태종 이방원처럼 합쳐쓰는 것만 규제한 사례도 있었다고 보면 된다. 조선의 이방원이 피휘를 널널하게 적용한 거고 당나라 이세민은 빡빡하게 적용한 것. * [[문종(조선)]]의 휘는 '옥이름 향(珦)'으로 흔하지 않은 이름을 골라 썼지만,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과 같았다. 드물게 겹친 사례. 이 때문에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왕이 우선하느냐 유가의 성현을 우선하느냐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왕을 우선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 후 문헌에서는 안향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안유(安裕)라는 초명을 쓰거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쓰거나, 그것도 곤란하면 호인 '회헌'을 주로 사용했다. * [[단종(조선)|단종]]의 휘 홍위(弘暐)의 홍 자가 자주 쓰이는 편인 글자이지만 단종의 경우 재위기간이 고작 3년 1개월여인 데다 복위되기까지 250년가량을 노산군으로 왕 취급 못 받았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듯하다.[* 앞서 말한 태종의 예처럼 두 글자 휘면 따로 한 글자는 피휘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앞서 설명했듯이 왕의 휘는 통상적으로 5대까지만 피휘하면 되기 때문이다. 황제의 경우는 7대까지. 물론 이 원칙을 무시하고 왕조가 망할 때까지 피휘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두 글자 휘라도 한 글자를 피휘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물론 태종 이방원은 예외다) 단종의 휘는 무시되었다고 보면 된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유자환(柳子煥)의 초명은 유자황(柳子晃)이었는데 [[예종(조선)|예종]]의 휘가 이황(李晄)이어서[* 晃과 晄은 이체자 관계이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 晃을 인명에 쓴 예가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흐르면서 피휘가 풀린 것으로 보인다.] 이를 피휘하기 위해 유자환으로 개명했다. * 조선 [[선조(조선)|선조]]는 즉위할 때 명종의 아들로 입적되면서 명종의 친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에 맞추어 개명했는데 하필이면 당시 대신 [[이준경]]이 추천한 휘 중에서 정종의 휘인 '曔'이 후보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건 국휘에도 걸리고 가휘에도 걸리는 사례이므로 당연히 꺼려졌어야 하는 일일 텐데도 어째서인지 당대에 이걸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정종이 당대에는 시호도 없이 그냥 명이 내려준 공정왕이라 불리는 등 제대로 된 왕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 또한 선조 때는 태종 때 한성부 판관을 지낸 인물인 원황(元晃)의 이름이 예종의 휘와 같다는 이유로 태종실록에 기록된 원황의 이름을 원황(元滉)으로 강제 개명시키는 일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02019_003|#]] * [[경종(조선)|경종]]의 첫 번째 부인 [[단의왕후]] 심씨는 원래 "온의(溫懿)"의 시호를 받았는데, 단의왕후의 12대조인 [[심온]]의 이름과 "온" 자가 겹친다는 이유로 "단의(端懿)"로 바뀌었다. * [[영조]]의 이름은 이금(李昑)인데 밝을 금(昑)자는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다.[* 반면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조는 피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로 여겼고, 자신의 휘를 40여 년 동안 알리지 않았으며 실생활에서 자신의 휘를 말하는 행위를 처벌하거나 지명이나 인명을 바꾸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310081114281&code=960201|#]]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지나친 피휘 문화 때문에 한자는 물론이고 발음이 비슷하다고 개명하는 일도 빈번한데, 이를 불필요하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 [[정조(조선)|정조]]는 피휘 때문에 이름의 발음을 아예 바꿔버렸다. 원래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祘)'으로, 이 때문에 [[평안북도]]의 이산(理山)이란 고을 이름이 [[초산군|초산]](楚山)으로 개명당했다. 그러다 결국 '祘'의 발음 자체를 '셩'(현대 한국어 한자음대로 규칙적으로 옮기면 '성')으로 바꾸게 된다.[* 이는 祘과 동자관계에다 대단히 많이 쓰이는 편인 算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조 당대에 산학산사의 이름이 주학계사로 바뀌었다.] 이후 [[순조]]대에 선대의 휘를 범할 수 없다 하여 [[함경남도]]의 이성(利城)이란 고을 이름도 [[이원군|이원]](利原)으로 바뀌게 된다. * 심지어 중국 황제의 이름을 피휘한 경우도 있다. [[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라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들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 다만 건륭제 재위 기간에 재위했던 [[정조(조선)|정조]]의 호가 홍재(弘齋)인 사실을 고려하면, 중국의 피휘를 따르는 경우는 외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로 한정되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아무래도 청나라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과의 역사적 악연 탓에 조선인들이 청나라 황제의 이름을 피휘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강했을 테니 말이다.] 근데 [[청일전쟁|청나라에 대한]] [[갑오개혁|종속이 끝난]] 뒤에는 홍례문으로 원상 복구시킬 법도 한데, 대한제국 시기에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경복궁이 활용되지 않아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흥례문으로 남았다. 그래서 현재도 흥례문이라는 피휘된 명칭이 유지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각산동은 본래 쇠뿔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소바우 또는 우암곡이라고 불렸으나, 구한말인 1907년에 이 곳에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宋憲冕)이 자기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호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여 소 우(牛)의 뿔 각(角)과 바위 암(岩)의 산 산(山)을 따 와서 각산동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