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귀 (문단 편집) === 남송의 명장 === 1197년 출생으로 평민 출신인 그는 병졸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기질이 뛰어나 밤에 활이 떨어지는 곳을 볼 수 있어 '여름밤의 눈'이라 불렸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죄가 있다고 하여 쌍기를 얼굴에 새겼는데, '하기아(夏旗兒)'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용맹함으로 [[여문덕]][* 하귀와 동향이다.]의 인정을 받았다. 1234년, [[단평의 입락]] 시기 [[조범(남송)|조범]][* [[조규(남송)|조규]]와 함께 [[조방(남송)|조방]]의 아들이다.]이 낙양을 수복할 때 그를 따라 전선에서 활약해 비장으로 승진한 이후 안풍(安豊)의 포위를 풀어 장교로 올랐다. 그 뒤 사방에서 전투하다 불리해지기도 했지만, 매번 작전에 성공하였다. 가희 3년(1239), 군사를 이끌고 수춘의 포위를 푸는 등 [[두고]], [[여문덕]], [[여개(남송)|여개]][* 여개는 뒷날 사천 지역에서 몽골군을 막아내나, 1254년 참소를 믿은 남송 조정으로 인해 급사한다.] 등과 함께 활약한다. 1246년에는 조규의 명령으로 고우(高郵)를 구했다. 비록 조범, 조규 형제와 여문덕 등과 함께 관계를 맺었으나, 이 당시에는 무명의 장수였다. 1257년 길주자사, 지회원군(知會遠軍)으로 승진했다. 보우 6년(1258), 하남초무사(河南初務使)를 겸하고, 곧 수춘군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7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1259년 백여 일 동안 회원을 수비하여 금띠 하나, 은 오백 냥을 하사받았다. 1260년 몽골의 [[우량카다이]]가 북으로 귀환하였고, 그는 위원(偉源)에 진출해 300여 척의 전선을 확보했다. 또 황석항에서 싸워 말 3백여 마리를 얻고 수창을 탈환하였다. 또 대승원은 황주 단봉에 올랐다. 지회안주로 옮기고, 경동초무사를 겸임하였다. [[이단(몽골)|이단]]의 남침을 막아냈고, 이단은 단기로 도망쳤다. 1261년 연수군과 동해군, 해주를 탈환하고, 백만관과 금대일, 여양전 3천 묘와 금구를 하사받았다. 1264년 사천무마제치사 겸 중경부로 임명되어 [[장각(남송)|장각]]과 함께 호소산을 공격하였으나, 거호에서 실패하였다. 1265년 몰래 군사를 이끌고 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시에 [[유정(원나라)|유정]][* 본래 북방 한인 출신으로, 이후 남송군에 항복한 뒤에는 맹공의 수하로 활약했으나, 여문덕의 무시 및 박해로 인해 1261년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한다. 그의 항복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다.]이 이끄는 군대 수천 명을 참했다. 1267년 광안군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영무군절도사(寧武軍節度使)에 봉해졌으며, 식읍 500호를 받고, 이백 호를 하사받았다. 1268년 연강제치부사(延江制治副使)로 황주(黃州)를 지냈다. 1269년 권형조·제치대사, 호광총영사, 사천책응대사, 지악주를 지냈다. 이 와중 양양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봄철에 한수가 불어난 틈을 이용해 양양을 지원하려 했으나, 몽골군에 대패했다. 그해 7월 5만 군대와 3천 척의 전선을 이끌고 양양을 다시 증원하나, 녹문산에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1270년 황주로 후퇴했고, 그 이듬해 은퇴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