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이난섬 (문단 편집) == 역사 == 이 곳은 한나라 시절부터 지금의 중국 북중부에 국한되었던 전통적 의미의 [[중원]]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변방 중의 변방, 오랑캐의 땅, 유배지 취급을 받았다. 기원전부터 백월의 일파였던 [[여족]] 내진 리족이 살던 땅이었고[* 다만 21세기 들어 [[여족]]이 원래 토착민이 아닌 중국 남부로부터 들어온 민족이었다는 얘기가 학계에서 슬슬 나오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런 식이면 구 대륙인 아시아에서 넘어갔다고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대부분은 원주민이 아니라는 소리라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여족을 하이난 섬 원주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원전 3세기 초에 [[남월]]에 의해 정복당하며 기원전 110년경까지는 본토의 [[광둥성]] 및 [[광시좡족자치구]], 그리고 북부 [[베트남]]과 함께 남월의 영토였다. 이후 남월이 [[한나라]]의 정복군주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면서 [[기원전 110년]] 한나라의 군현 [[삼국지/지명/교주#s-7|주애군(珠郡郡)]]으로 편입되어 중국사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 정복 당시의 인력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나라는 [[한원제]] 초원(初元) 3년([[기원전 46년]])에 주애군을 폐하고 이곳을 포기하였다. 이러다가 [[삼국시대]]에 다시 [[손권/남방 개척|손권이 이곳으로 제갈직과 위온을 보내기도 했다]]. [[육손]]이 반대했지만 강행했는데 득보단 실이 컸다.[* 오나라는 이 때 [[대만]]과 [[류큐]] 심지어 [[일본 열도]] [[규슈]] 남단까지 정벌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특히 손권의 진출 시도는 [[한족]]의 대만 진출 시도 첫 사례이기도 하다. 결국 중국의 대만 진출은 [[원나라]] 때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곁다리로 대만 북부를 정복해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인 [[몽골인]]이 최초로 성공했다.] 어쨌거나 손권은 적오 5년([[242년]])에 지금의 [[광둥성]] 레이저우(雷州) 반도에 주애군을 복구하고, 하이난섬 북쪽에 다시 진출해 그곳들을 다스렸으며 산하에 원래 합포군의 서문현을 관할하게 했다. 이 당시 주애군에는 몇 개의 현이 운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나라가 주애에 [[섭우]]와 [[육개]] 등을 보냈을 때 현재의 [[하이커우시]]에 있었던 주애현을 다시 복구하여 주애군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하이난섬에 중국 왕조가 진출했지만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지배는 느슨했고,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진나라는 다시 주애군을 포기하고 합포군에 병합시켰다. 이후 남조 [[송문제]] 8년([[431년]])에 주애군을 복권하여 서문현을 다스렸으나 곧 폐군하기도 했다. [[607년]], [[수나라]]는 다시금 옛 주애군에 있던 애주를 주애군으로 고치면서 하이난에 다시 행정구역을 세웠다. [[당나라]]는 주애군을 애주로 바꾸었으며 [[송나라]]는 애주를 경주(瓊州)로 바꾸고 애주는 하이난 섬 남부인 지금의 [[싼야시]] 서쪽 애주 고성으로 옮기면서 하이난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로는 [[주애]](珠崖)나 경애(瓊崖)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유배지로서 [[소동파]]가 이 곳으로 유배 오기도 하였다. 하이난이 좀 더 중국의 일부로 확실히 받아들여진 건 약간 더 뒤인 [[몽골인]]들의 [[원나라]] 때부터였고 [[명나라]], [[청나라]]를 지나며 확실히 중국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타이완섬]]이 중국사의 범주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다가 [[청나라]] [[강희제]] 대에서야 확보되어 경영된 거와는 달리[* 물론 중국 정권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뿐 [[한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만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으며 이러한 [[푸젠성]] 출신 이주 어민들이나 상인들이 기반이 되어 [[네덜란드]]를 전쟁으로 쫓아낸 한족 수군 군벌 [[정성공]]이 정씨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하이난은 한나라 시대부터 비록 직접지배는 못 받았을지언정 확실히 중국의 일부로 포섭되어 양광지방의 부속도서 취급을 받았으며[* 대만은 [[대만해협]]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풍랑이 심하면 배편이 끊길 정도로 접근하기가 어려웠으나 하이난은 대륙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고대부터 경영되어 왔다.], 중원이나 연경, 강남 등과 한참 먼 거리 덕에 유배지로 각광을 받았다. 어느 정도냐면 하이난 유배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나마 나올 희망이나 있던 본토 유배와 달리 하이난은 살아서 다신 못 나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극악으로 먼 거리와 극악으로 덥고 습하고 태풍이 자주 오는 기후, 그리고 배가 아니면 왕래가 불가능한 환경 때문. 이러한 극악의 고립된 환경은 파촉 지방 정도가 비견할 만 하다.[* 비슷한 취급을 받은 곳은 현재 [[베트남]] 중부 [[다낭]] 일대인 일남군으로 일남은 더위가 화끈한 열대 지방이며 거리도 절망적으로 멀어 아예 유배갈 때 장례식을 치를 정도였다. 거기에 일남군은 이민족인 [[참족]]의 공격으로 결국 뺏겨버리고 거기에 [[참파]]가 들어섰다.] 근대에 들어선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확보한 [[일본 제국]]이 추가로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 대신 하이난을 요구하려다가 포기하였다. 이유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이다. 비행기가 없던 과거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가장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편인 [[가고시마]]에서도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광동군벌 등본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26년]]에 [[국민혁명군]] 4군 군장 [[리지선]]이 원정하여 [[중국 국민당]]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는 이 지역을 '''하이난 특별행정구'''라는 행정구역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에서 하이난을 공격한 [[일본군]]은 중국 국부군을 대패시키고 하이난을 점령한다.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에는 하이난에서 근무했던 일본군 학도병의 구술이 수록되어있는데, 이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섬 중앙부에 잔존한 저항군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고 산발적인 교전과 대치가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하이난의 중국 저항군은 지역 독자적인 유격대와 공산당 유격대로 나뉘었고 국민당 정부의 영향력은 미미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해군 예비장교들 사이에서는 [[이오지마]]와 함께 미군 상륙의 우려가 높은 지역으로 여겨져 기피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옥음방송]]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하이난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중국 국민당 군대가 하이난을 접수했고, 일본군 부대들은 국민당의 관리 하에 있다가 1946년 3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바이충시]] 휘하 18만명 대군이 넘어가, 중국본토에서 결판이 난 지 오래인 [[1950년]]까지도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대만섬도 그렇지만 당시 [[인민해방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그해 5월 1일에 민간어선 수백척을 동원하여 [[하이난 섬]]에 상륙하여 공세를 벌이고 중앙정부로 부터 아예 보급하달이 끊겨버린[* 이미 [[국부천대]]로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쳤었다..] 18만대군은 효율적으로 하이난 섬을 지키기 어려웠다. 또한 지휘관 바이충시도 장제스의 권유로 이미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쳤으며 하이커우와 충저우 사이의 좁은 해협을 수십만명의 대군을 밀어넣은 인민해방군에 의해 [[중과부적]] 으로 밀려 결국 중화민국군은 철수했다.[* 이곳을 접수하고 그 다음 최종 목표가 바로 [[대만 섬]] 점령이었는데 미국이 대만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 진공을 무기한 보류했다. 하이난이 몇 개월만 더 버텼다면 지금 와선 대만과 같이 공산화를 피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하이난섬을 가르는 충저우 해협은 폭이 약 30km 정도로 타이완 해협에 비해 크게 좁아서, 당시에는 해군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인민해방군]]도 민간 어선을 징발해 건너올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에 들어간 이후로 [[광둥성]]에 속해 있다가 [[1988년]]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으로 승격되었다. 한때 [[전라도]]에 속해 있다가 독립한 [[제주특별자치도]]와 유사한 케이스. [[1980년]] [[중국]]의 개방 정책과 함께 [[광둥성]] [[선전시]]와 [[산터우]], [[주하이]], [[중산]], [[포산]], 산웨이, [[푸젠성]] [[샤먼시]], [[푸저우시]] 등과 함께 경제특구로 섬 전체가 지정되면서, [[1990년대]]까지는 특별행정구가 아닌 국내 경제특구임에도 중국 인민은 출입증이 필요했다. [[2010년대]] 이후 그간 듣보잡으로 외면하던 [[한국인]]들도 하이난 관광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기 시작했으며 원래 많이 찾아오던 [[러시아인]] 관광객들의 수도 항공편 증가로 더 늘어났다. 거기에 [[2013년]] 이후 하이커우가, [[시진핑]]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으로 인해, 해상 실크로드가 개발되어 중요도가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후베이성]]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서 티베트, 내몽골과 함께 그나마 조용한 몇 안되는 곳인데 바다를 건너야 하는 섬의 특성 상 그런 게 큰 듯 하였다. 그러나 오미크론 대유행에는 여기도 뚫려버렸다. 오미크론은 한술 더 떠서 중국이 홀로 외로이 고집하는 제로 코로나 자체를 실패시켰고 시진핑은 3연임을 해도 뒷맛이 개운치 않게 생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