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학캬리 (문단 편집) === 학캬리 후국 (샴보 왕조) === [[파일:하카리 터키 3.jpg|width=700]] 1700-01년 이브라힘 베이가 세운 메이단 메드레시 14세기 말엽 [[티무르]]의 침공 이후 [[모술]] 일대의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들이 학캬리 산지로 피신하였고, 늘어난 인구를 바탕으로 아르메니아 왕실의 방계인 아르추루니 가의 후예라 전해지는 쿠르드인 귀족 이젯딘 (요자단) 쉬르가 1384년경 학캬리를 중심으로 한 토후국을 세웠다. 쉬르는 [[티무르 왕조]]와 [[흑양 왕조]]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며 지배를 이어갔지만 1423년 그가 사망하고 얼마 후 흑양 조의 군주 카라 이스칸데르는 쉬르의 자손들 대부분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이로써 일시 멸망했던 학캬리 후국은 흑양 조가 멸망한 15세기 후반, 이집트에 망명해 있던 쉬르의 후손 아사드 앗 딘 자린을 학캬리 기독교도들이 초청하며 복구되었다. 왕국 재건은 토요일 (현지어로 샴보)에 이루어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샴보 왕조라 명명되었다. 비록 자린의 아들이자 후계자 이젯딘 쉬르 2세가 1491년 [[백양 왕조]]의 술탄 야쿱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왕조는 계속 이어졌다. 쉬르 2세의 아들 자히드 베그부터는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경쟁 속에서 유리한 쪽에 붙으며 자치를 누렸다. 다만 자히드 베그 사후 친오스만과 친사파비 세력 간의 내전이 터지며 백년간 13명의 에미르가 등극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한편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는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시리아 정복과 아나톨리아 진격으로 가시화되었다. 학캬리와 보흐탄 등 쿠르드 후국들은 후자의 반란에 동참하여 사실상 자립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후 심화되던 [[근동]]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을 지원하며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따라서 19세기 들어 학캬리 일대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줄곧 파견되었고, 서구식 학교가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