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강대교 (문단 편집) == 역사 == 지금의 한강대교가 있는 위치는 옛날 [[노들나루]]가 있던 곳으로, 강의 유속이 느리고 강폭이 좁아 포구가 형성되기 좋은 곳이었다. [[숭례문]]을 지나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바로 이 나루터에 낳았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 [[부평]], [[제물포]] 방면이나 [[김포]], [[강화도]] 방면, [[수원]]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있었다. [[정조(조선)|정조]]가 수원에 있는 [[융릉]]으로 행차할 때 나룻배를 엮어 부교를 놓아 건넜다는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구한말]]에 들어 [[인천항]]이 개항하고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경인간의 교통망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한강철교]]는 1900년에 이미 가설되어 열차가 오고 갔지만, 한강을 자동차로, 혹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 한강철교를 가설할 때에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인 J.모스(Morse)에게 [[경인선]] 철도의 부설권을 부여할 당시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모스로부터 철도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은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또, 당시만 해도 민간용 차량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객과 화물의 운송은 대부분 철도와 수운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교 가설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고 강을 건너려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운으로는 한계에 다다랐고, [[조선총독부]]는 제1기 치도사업의 일환으로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7년]] [[10월 7일]]에 준공하였다. 이 당시 총 공사비는 843,000원이 소요되었다. 이때 노량진 쪽에는 경간 60m인 7연의 한강대교와 용산측에 경간 60m인 3경간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하여 준공하였다. 이때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는 중지도∼노량진 간의 7경간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간의 3경간 188m의 소교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차도는 4.5m, 좌우 보도는 각각 1.6m였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하였으므로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상기 수치와 비교, 0.5m정도의 오차 가능)에 불과하였다.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교량 가설 10년 후에는 협소한 인도교 하나로 그 교통량을 처리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더군다나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 7월 19일 오후 1시 30분 경에 중간둑이 유실되면서 소교 부분이 완전 유실되는 등 큰 손상을 입었으므로 유실된 소교를 길이 459m, 너비 18m로 확장하여 재건하고 [[서울전차|전차]]궤도도 부설하는 공사를 1927년 5월에 시작하여 1929년 9월에 준공하고 18일에 도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소교에 비해 대교 부분의 폭이 협소하여 차량 소통 등에 불편이 누적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34년 8월 신교 건설에 착수하여 2년 후인 1936년 10월 23일에 현재의 규모와 거의 같은 교량을 준공하였다. 같은 기간에 2번째의 인도교인 [[광진교]]도 건설되었다. 그로부터 이 한강교는 서울과 강남을 연결하는 단 둘뿐인 통로로서 서울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철교 및 인도교의 개통으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되었고, 이 다리 북단의 [[신용산역]]~[[삼각지역]]에 이르는 지역이 번화하게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광진교]],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을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 이때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폭사 및 익사하였으며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을 [[9.28 수복]] 직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하였다. 이때까지 8년 동안을 강북과 영등포의 차량 통행은 이 1차선 부교 따위를 통하여 간신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1965년, 지금의 [[양화대교]]가 제2한강교라는 이름으로 건설될 즈음에 이 다리도 한강인도교에서 제1한강교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로, 한강대로 남단 교차로는 한때 [[경부고속도로]]의 임시 종점이었던 적이 있다. [[1968년]] 12월 서울 - 수원 간 부분개통 당시 투기꾼들로 인해 [[한남IC]] ~ [[반포IC]] 구간의 토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해당 구간을 1년 뒤인 [[1969년]] 12월에 [[한남대교]]와 함께 개통하고, 최초 개통 시에는 임시로 [[반포IC]]에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방면으로 꺾인 선형의 도로를 건설했다. 즉 현재의 [[현충로(서울)|현충로]]와 [[사평대로]]가 1년간 경부고속도로 구실을 하였다.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함으로 인하여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 24일에 준공하였는데, 기존 교량과 같은 규모의 설계에 의하여 중지도∼한강로의 소교 구간(북측)은 기존교량의 동쪽을, 중지도∼노량진의 (남측) 대교 구간은 기존 교량의 서쪽을 확장하였다. 종전의 폭을 20m에서 40m로 확장하여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하였으며 1984년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에 따라 한강대교로 개칭하였다. 기존 제한속도 60km/h이었으나 2019년 12월 20일, 서울 중앙버스전용차로의 안전속도 5030 정책 시행으로 지금의 50km/h로 하향되었다. 한강대교는 중앙버스전용차로는 아니지만 남북단 모두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022년 4월부터 다시 60km/h로 상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