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영화 === 1. [[https://www.kmdb.or.kr/vod/player2?movieId=K&movieSeq=00622&mulId=784&fileId=91344&levelClss=A&userId=|'''아! 백범 김구 선생(1960)''']]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전창근 감독의 1960년 영화이다. 작품의 감독을 담당키도 한 전창근을 비롯하여 조미령 등이 주연으로도 출연하였고, 성동호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여러 행적에 관련 기반을 두고 있다. 영화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2. '''아나키스트(2000)''' 의열단 단원들의 도움으로 공개처형장에서 목숨을 건진 상구는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어느 날, 상하이의 일본군들을 상대로 대담한 테러작전을 감행하던 단원들에게 독립자금을 착복한 러시아인을 암살하고 돈을 되찾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파일:UfxDs8bMCmCvAG3bjTXpwg.jpg]]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작품성에 있어서는 매우 훌륭한 명작으로, 이 영화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아무 가감없이 보여주는 국내의 거의 유일한 영화다. 1933년 3월 17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육삼정 의거 사건''' 주역인 백정기 의사를 그리며 이강훈이 했던 회고와 아주 닮아있다. 이 영화 이후 영화 "암살"과 영화 "유령"도 계속 육삼정 사건 재탕 삼탕한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영화 암살과 영화 유령은 배경이 조선 경성인데, 당시 경성으로 무기를 운반해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개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영화들은 대중성을 중시한 화려한 액션 영화나 애국심을 고양할 목적에서 만든 감성팔이 영화, 혹은 단순한 오락거리 영화들밖에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고증도 형편없고 후세의 미화나 어설프게 현대적인 해석을 집어넣어 실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는 한참 떨어진 영화들뿐이지만 이 영화는 당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있었던 사상적 충돌과 내부 갈등, 횡령, 배신, 숙청, 암투, 이중첩자 등의 실제 모습을 아무런 치장이나 연출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고지전(2011)''' 양효삼 (고창석役) 계급은 상사. 악어중대의 최연장자로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출신이다. 고향이 평안도라 북한 말을 쓴다. 악어중대의 원년 멤버 중 하나로 부사관 중 최고참임에도 항상 능글 맞고 살가운 태도라 중대원들에게 큰형 같은 이미지이다 [[파일:고지전_광복군총사령부뱃지.png]] [[파일:고지전_광복군총사령부고창석.png]] 영화 초반부에서 광복군 뱃지를 볼 수 있다. >양효삼 상사 : 내래 일정때는 광복군이었시오 > >강은표 중위 : 어?! 독립운동? > >양효삼 상사 : 만주에 있었디요 (뱃지를 보여주며) >때는 바야흐로 1941년 화백산 전투 요거이 임정에서 받은 광복군 뱃지라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일본 관동군 아새끼들이 개떼같이 몰려오고 총알은 똑 떨어지고 아! 그냥 딱 죽자! 다만, 영화 고증상의 오류를 꼽자면[[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3&levelId=ij_009_0010_0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9D%8E%E8%98%87%E6%B0%91&searchKeywordConjunction=AND&fbclid=IwAR1q0f0ZTBoymhbeNFRS096LzFAf_oZSf9pigAQ6yBNNeWIZwFGRwmyonqU|광복군 총사령부 잠행편제표(總司令部 暫行編制表)]]에서 볼 수 있듯이 총사령부 인원 절반 이상은 중국군인데다가 제일 어린 나이인 조소앙 선생의 아들인 조인제 소위와 박찬익 선생 아들 박영준으로 이루어졌다. 장교비중이 많은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으로 편제된다하더라도 최소 소장계급[* 안춘생]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강은표 중위의 소속은 국군 방첩대(CIC)[* 現 기무사령부]로 현실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이 한국전쟁 전후로 간첩조작으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았던 걸 생각하면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웃을 수 없는 장면이다. 실제역사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은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과 대립 관계에 있었고, 김창룡은 이러한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의 반대 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4. [[https://namu.wiki/w/%EC%95%94%EC%82%B4(%EC%98%81%ED%99%94)|'''암살(2015)''']] 육삼정 의거는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훙커우(虹口)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원심창 등은 고급 요정인 육삼정에서 주중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아키(有吉明)가 만찬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밀정의 신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거사는 실패했으나 이후 중국과 한국 등지의 신문들이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대서특필하면서 침체기에 있던 국내 항일운동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시도 의거와 함께 일제강점기 해외 3대 독립 의거로 꼽힌다. 영화 상에서는 상하이가 아닌 경성에 총기와 폭약을 반입하고 약산 김원봉과 합작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당시 백범 김구는 정화암, 유기석, 유자명과 같은 무정부주의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합작해서 친일부역자(밀정)들의 처단을 위해 투쟁했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김좌진은 1930년 1월에 피살되었고, 상하이로 옮겨온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장도선, 정화암, 정해리, 안공근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조승우 役)은 1924년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지는 일을 끝으로 의열단이 이런 소규모 테러적인 항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해야 함을 느꼈고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여 의열단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927년 [[난창 폭동]]에 일부 의열단이 참여하자 이에 의열단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 등이 여러 투쟁의 방향성은 물론 사상적으로 많은 다툼을 겪었고 결국 의열단은 와해된다. 이후의 테러는 의열단의 체계적 조직을 통한 테러가 아닌 개별적인 투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영화적 고증을 따지자면 실존인물은 정화암이나 유기석 정도 넣어야 고증에 맞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의 모델은 염동진[*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나온다.]이라는 실존인물이다. 염동진은 중국에서 [[남의사]][* (중국어: 藍衣社, 영어: Blue Shirts Society, BSS)는 극우 정당 중국 국민당 산하의 파시즘 비밀조직으로 장제스의 지휘 아래 중화민국과 국민당을 군국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간 일종의 정보기관이자 준군사조직이었다.] 일원으로 활동 중 1937년 일제 관동군에 체포되었다. 1940년 풀려났고, 이후 전향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나 본인은 끝까지 극구부인하였다. 김구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극중 염석진과 유사하다. 한국전쟁 중 납북. 전지현의 극중 이름 '안옥윤'은 안중근, 김상옥, 윤봉길 3명의 독립의사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이름을 '윤옥'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전 영부인 김윤옥과 이름이 겹치는 관계로 '옥윤'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김상옥은 극중 안옥윤처럼 (중국이 아닌) 경성에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수백명의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 순국했다. 5. '''귀향(2016)''' [[파일:귀향_독립군.png]] [[파일:귀향_독립군2.png ]] 후반부에 위안부 소녀들을 집단 학살하려는 일본군들을 공격하는 독립군들이 나온다. 영화 귀향은 강일출 할머니의 기억을 참고하여 만든 영화이다. 문제의 발단은 대다수의 관객들, 그중에서도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분들은 >"광복군이 만주에 간 적이 없는데?" >"한국광복군이 그 시기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적이 없다, 엉터리다!" 라는 혹평도 있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1944년 9월에 만주지구 공작반에 정보요원 김근수, 유원해, 윤원장, 안원생, 안우생[* 안중근 의사의 조카들이다.] 등이 파견되어 잔존 독립군들과 접선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정보수집이 목적이지 만주군과 직접적인 교전을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다. 또한, 김학규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 제 3지대 중에서도 1945년 초, 만주 펑톈 소재 동광 중학(東光中學)을 중심으로 비밀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던 이영순(辛英淳)·오성규(吳成奎)·조승희(趙昇熙)·김철수(金鐵壽)·이선규(李善奎)·김병익(金炳益)과 장춘(長春) 법정 대학(法政大學)의 한이윤(韓伊尹) 등이 만주를 탈출하여 베이핑 경유해서 광복군에 입대한 사례도 있기 때문에 당시 광복군이 만주국으로 갈 수 있는 신분증이 있다면 못가는 지역도 아니었다. [* 다만,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김원봉과 결별한 조선의용군도 당시 만주에 입국거부된 적이 있다.] 반은 맞는 이유는 설령 광복군이 만주에 들어갔다하더라도 삼엄한 경계에 무기나 장비 반입이 쉽지 않았고 저런 형태의 전면전 전투는 큰 군대의 지원이 없으면 사실 상 불가능하다. 광복군 창설때부터 광복을 맞을때까지 초모공작이 주된 업무였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0703080222744|강일출 할머니 증언]] >경북 상주 출신인 강 할머니는 열여섯살 때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중국 선양과 창춘을 거쳐 무단장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했다. > >이후 강 할머니는 태평양 전쟁말기 장티푸스에 걸려 부대 밖으로 이송돼 불에 태워지려다 독립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 중국 인민해방군 간호사를 거쳐 지린 병원에서 근무하다 지난 2000년 3월 귀국했다. 하지만, 1945년 5월 2일 소련군에 의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함락이후, 소련군이 극동으로 병력을 보내 1945년 8월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수행했었고 만주군과 관동일본군이 박살나는 상황이었다. 강일출 할머니를 구출한 독립군의 실체는 아마도 '한인계 소련군'이거나 또는 당시 만주에 살고 있던 교민들에 의하여 구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광복군 대원이 위안부 여성을 접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확군시기에 일본군 부대를 접수하면서 부터 일본군 부대 내에 한국인과 일본군을 분류하여 귀국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여성을 목격하고 슬퍼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