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조선의용대의 제 1지대 편입 배경 ==== 1942년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제 1지대로 편입되면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16|이준식]](李俊植)은 임시정부의정원의 비서장이 된다. 잔존파 조선의용대는 편제상으로 충칭(重慶)의 지대본부, 후베이성(湖北省) 라오허커우(老河口)에 제 1구대와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 제 2구대를 갖추고 있었고 각 구대에는 3개 분대를 편제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대원수는 지대본부에 42명, 제 1구대에 27명, 제 2구대에 23명 등 모두 92명 정도로 추정된다. [[https://m.cafe.daum.net/gwangbok815/JCwr/4302?listURI=%2Fgwangbok815%2FJCwr|조선의용대 명단]]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된 배경'''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당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과 함께 퇴각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4개 지대(구대)는 각기 분산되어 사실상 각 지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부대를 전개하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은 우한에서 퇴각한 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대 90여명 병력과 함께 국민당의 수도 [[충칭]]에서 머물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지대는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으로 퇴각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원봉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대에 대한 통제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최창익과 대립''' 민족혁명당 내에 조소앙, 지청천 등이 떠난 뒤에도 최창익운 김원봉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 후에도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최창익 세력과 '''"중국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서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으므로 민족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과 함께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김원봉 세력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그는 김원봉이 이념이 선명하지 못 하다고 보고 불만을 품게 된다.[* 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75페이지]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문제에서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원봉은 국민혁명군과의 연합전선을 바랬는데 반해, 민족혁명당을 계급 정당으로 만들려 했던 최창익은 중국 공산군인 신쓰준(新四軍)과 연합을 바랐다. 1939년 조선의용대 제 2지대가 허베이성(河北省) 제 5전구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필두로 한 제 2지대안에 신쓰준(新四軍)의 지하조직이 세워진 뒤부터 일부 대원들이 중국공산당원이 되었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내에서 약산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위원장 [[최창익]]은 중국공산당과 결탁하여 김원봉과 국민당의 허가없이 병력을 이끌고 무단으로 이탈하여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의 옌안(延安)으로 가서 중국공산당과 그 휘하의 [[팔로군]]과 연계했다. 거기다가 1940년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자신의 첩이 다른 아나키스트 김진익과 불륜, 임신한 사실과, 상하이 임시정부내 보수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임정 참여를 거부하고 옌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우리도 떠날 때라며 전시복무단원은 물론 조선의용대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함께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하였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그를 따랐다. 최창익은 [[김두봉]], [[김무정]], 한빈 등 연안에 있던 한인 공산-사회주의들과 규합한 후, 이들과 함께 다른 조선의용대 지대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합류할 것을 설득, 종용했다. 이에 다른 병력도 동요, 이탈하여 화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옌안(延安) 합류 여부를 놓고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김원봉의 의견에 반(反)하여 조선의용대의 옌안(延安) 합류가 의결되었다. 김원봉의 본대 병력 90여 명은 충칭에 잔류하였으나, 나머지 지대는 모두 화북으로 떠나 1941년초까지 옌안(延安) 합류를 완료했다.[* 다만 이후에도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 화북지대 공산당원의 수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20&levelId=ij_035_0010_0064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C%86%8C%EB%AF%BC&searchKeywordConjunction=AND|'''조선혁명운동 원조방안 담화회 기록''']] > >시간: 1940년 4월 2일 오후 3시 > >(중략) > >결정사항: >이후 조선혁명운동의 처리방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음: > >'''1.양당을 병존시키되 공작성과에 따라 지원을 달리한다.''' >'''2.양당의 공작지역을 구분한다. 황하 이남 장강 이북은 광복진선의 공작구역으로, 장강 이남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공작구역으로 정한다'''. (完)[* 이 협의 내용은 훗날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와 제 3징모분처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데, 장시성 상라오가 양쯔강 이남에 있기 때문에 김문호와 파벌싸움을 벌이게 되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옌안파의 단독 행동은 임시정부에서도 협정 위반이었다. 1940년 4월 2일, 김구의 광복진선(제 5지대 전신)과 김약산의 조선의용대와 협의가 해서 한독당이 장강[* 양쯔강]이북을 담당하고 조선의용대가 장강 이남을 공작구역으로 정했다. 1939년 11월에 발족한 청년전지공작대가 시안으로 이동하여 활동했었고 조선의용대 잔류파들은 라오하커우와 장시성 상라오에 주둔하고 있었다. 오히려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김준 구대장과 이소민 구대장은 협의된 바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09_0050_00010|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황허(黃河)를 건너 중공 측에 가담하게 된 경과]]'''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 >1941년 > >조선의용대는 원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직속되어 대적 선전활동을 전개하던 한적 청년단체로 중화민국 27년(1938)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성립되었습니다. 총대장 김원봉(金元鳳)(일명 김약산金若山, 별명 진국빈陳國斌) 휘하의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에 1백 명 전후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원들은 모두 적색청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이론은 완전히 소련 및 중공의 의사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시국에 대한 저들의 관점도 우리와는 전혀 딴판입니다(이 부분은 조선의용대의 간행물인『전고(戰鼓)』제 1호(第 1號)를 참고하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중국의 항전건국 이론에 대한 조선의용대의 입장은 중공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 >중공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조선의용대는 과분할 정도로 중공을 중시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주된 활동무대는 비록 黃河 이남이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河北(중공 활동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숙원은 하루속히 ‘중공천당(中共天堂)’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지난 3~4년간 오직 도하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금년 3월 하순부터 6월 하순에 걸쳐 3개 지대원 1백여 명이 모조리 ‘화북 적후공작 전개’라는 명분으로 황하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 >조선의용대 제1 · 제2 두 지대는 한커우(漢口)에 있을 때부터 이미 도하의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지난 3년간 뤄양(洛陽) · 라오하커우(老河口) 일대로 주재지를 옮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간 부단히 옌안(延安)과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민국 28년(1939)에는 조선의용대원 수십 명이 연안의 항일대학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는 등 오래전부터 도하의 준비를 하였으나 조건들이 맞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낙양의 군사당국은 조선의용대의 동태에 대해 엄밀한 감시를 진행하고 도하증명서를 발급하지 않아 조선의용대는 숙원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 >금년 3월 상순, 조선의용대 제3지대는 충칭 重慶에서 뤄양으로 주재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총대장 김원봉과 박효삼 朴孝三(이 두 사람은 모두 중앙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인 관계로 중국인 친구들이 매우 많습니다) 등은 충칭과 뤄양에서 도하증명서를 얻어내기 위해 운동을 진행하였고 마침내 금년 3월경 낙양에서 제 3지대의 도하허가증을 발급받게 되었습니다. > >조선의용대는 3월 하순, 박효삼(朴孝三) · 양민산(楊民山) · 김세일(金世日) · 이춘남(李春南) 등의 영도 하에 우선 제 3지대원 전부를 린현(林縣)의 중국군 제 40군 주방지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이곳은 중공군 주둔지와 50華里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이로부터 채 한 달이 못되어 조선의용대 제 3지대는 40군의 주방지를 벗어나 중공군 활동구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뒤를 이어 낙양과 노하구에 주재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제 1 · 제 2지대도 정치부의 명령을 어기고 김학무(金學武) · 왕자인(王子仁) · 호철명(胡哲明) 등의 인도 하에 6월 하순 남몰래 황하를 건너 중공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선의용대는 황하를 건너기 오래전부터 두 가지 수속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수속은 ‘화북 적후공작 전개’라는 명분으로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요구하여 화북의 각 전구사령부에 정치부 명의로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협조를 제공하라는 통령을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수속은 제18집단군 당국과 사전에 결탁을 모의한 것입니다. > >현재 대원 전부가 중공 활동구역 내로 들어간 조선의용군은 이미 중공 및 재화조선청년연합회(在華朝鮮靑年聯合會) - 이 단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도 하에 한적 공산분자 이건우(李健宇) · 허정숙(許貞淑, 여성) · 무정(武丁, 한적 공산당원으로 현재 18집단군 모 사단의 포병연대장을 맡고 있음) 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에 참가하여 화북의 한교들을 적화시키는 공작을 개시하였다 합니다. > >조선의용대는 계속하여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해 총대장인 김원봉은 여전히 중경에 머물며 껍데기뿐인 조선의용대 대본부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낙양과 노하구 등지에는 3-5명의 노쇠하고 병든 대원들을 남겨 판사처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한 연막전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 >이상의 사실들은 모두 믿을만한 것들입니다. 조선의용대 대원 가운데 공산당이 되기를 거부한 대원 몇 명이 이미 한국광복군에 귀순하였는데 이들의 진술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아마도 위 문서는 이청천 총사령관이 쓴 글로 보이는데, 실제로 조선의용대가 편입되고 나서도 김약산 제 1지대장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서이다. 백산 지청천 장군과 약산 김원봉과의 악연의 시작은 1935년 민족혁명당 내부의 권력 투쟁 결과 김원봉, 김두봉 등 사회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자 지청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집단 탈당하게 된다. 민족혁명당 탈당 후 지청천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창당,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3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940년 3당을 합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정당인 한국독립당이 탄생된다. 더 올라가서 서일 총재를 대표로 한 대한독립군단 시절 지청천 장군은 자유시 참변(1921)을 겪었었다. 이는 독립운동계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는데, 바로 매카시즘이 일어나기에 앞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소련 적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니까 우리편" 으로 생각했는데, 배신을 겪었다는 감정과 함께 "공산당은 상종할 놈들이 아니다", "공산당은 결국 분열을 일삼는다" 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준 사건이었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ij&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ij_011_0010_00240&position=-1|'''총사령 이청천에 대한 불만에 관한 정보(1942. 6. 11)''']] > >문서번호 侍泰第4640號 > >발신자 : 군사위원회 시종실(軍事委員會 侍從室) >수신자 : 우티에청(吳鐵城) > >民國 31(1942)년 6월 11일 >한국광복군 겸임 제 1지대장 김약산(金若山) 등의 한국광복군총사령 이청천에 대한 불만에 관한 상황 정보 > >한국광복군 제1지대는 본시 조선민족혁명당 분자들에 의해 조종되었습니다. 최근 한국광복군의 개조(改組)로 김약산이 지대장직을 사임하고 김약산 계열의 송수창(宋壽昌)이 제 1지대장직을 계임하기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총사령 이청천이 돌연 한국독립당의 조시원(趙時元:한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의 동생)을 제 1지대 정치지도원에 임명한다고 발표하여 김약산과 송수창 등의 불만을 자아내게 되었습니다. 김과 송은 이청천이 사전에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데다 통수부에 청시(請示)[* 지침대로 요청]하지도 않고 임의로 발표한 인사명령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송수창은 사의를 표명하였고 김약산은 “‘한국독립당’ 분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조선민족혁멱당’ 당원을 흡수하려는 책동을 버려야 한다”고 김구 등을 힐난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약산 김원봉과 대동청년단 지청천, 조선민족청년단 이범석과의 악연은 광복 이후 미군정 시절에도 계속 이어지게 된다. 약산 김원봉이 옌안(延安)에 있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거부한 것은 [[난창 폭동]] 때 중국공산당에 토사구팽당한 후, 중국이나 소련 공산당과 절대 연계하지 않고, 좌우 독립운동가들과 합작하며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강한 신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지시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스스로 명령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김원봉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돈만 대줄 뿐 크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고, 장제스와는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었지만, 공산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이었다. 1940년대 당시 전세계 공산당 조직은 모두 각지의 독립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코민테른 그 자체나 다름없는 소련 공산당이나 그에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연계한다면 공산당 조직의 특성상 철저하게 종속될 것이 뻔했다.[* 1920~30년대 공산주의와 합작한 아나키스트 정화암, 유기석도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노선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최창익이 옌안(延安)으로 이탈한데 이어 다른 지대도 최창익을 따라 옌안(延安)으로 이탈하자 다급해진 김원봉은 이탈한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직접 옌안(延安)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통제권을 장악한 최창익과 김두봉, 김무정 등이 이를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난창 폭동]] 이래 김원봉과 관계가 틀어진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다. 결국 신변 안전 및 지휘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연안 방문을 포기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래에 나와 있는 김원봉의 유명한 영상물은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그를 배신하고 화북으로 이탈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 [[파일:attachment/Yaksan03.jpg|width=100%]] || ||1940년에 촬영된 [[https://www.youtube.com/watch?v=e_NIaY5Mu9U|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 속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1941년 4월, [[윤세주]]와 박효삼이 끝내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떠났다. 윤세주와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랐고, 이후 의열단, 황포군관학교, 난창 폭동,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이때까지 평생에 걸쳐 김원봉과 생사를 함께 해왔던 아우이자 동지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알게 된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 되었고, 김원봉은 그에게 조선의용대 제1지대(본대)의 지대장을 맡겼었다. 이 둘의 이탈은 김원봉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8|김승곤]] 지사의 인터뷰에서는 조선의용대 제 2차 챵샤회전(第二次 長沙會戰 | 1941년 9월 6일 ~ 10월 8일)이 끝나고 조선의용대가 독자적인 활동노선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화북진출을 결정하면서 제 9전구에 배속되어있던 조선의용대 제 1구대 1940년 3월 뤄양(洛陽)으로 북상할때까지 진행되면서 1구대 조직체를 조선의용군에게 뺏기게 된다. >Q : 죽었다구요? 구대원[* 조선의용대 1구대를 말함] 중에서 한 30명이 죽었습니까? >김승곤 : 아니 지금은 없어요. 지금. > >Q : 아, 지금은 안 계신다구요. 그 당시는 1개 구대가 몇 명 쯤 되었습니까? >김승곤 : 제한이 없죠. > >Q : 예, 그냥. 보통 한 30-40명 되었습니까? >김승곤 : 네. 한 30명 되었어요. 그리고 산서성 염석산부대, 염석산부대. 거기 가서, 광복군 2지대 사람들이 거기 있었거든. 그걸 알았어요. 알고, 그래 북쪽으로 가자. 그래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60|신악]] 선생을 구대장으로 하고, 이대호라고, 여기 와서 대구대학 교수했습니다. 거기서 중산대학 영어과를 나와서 교수하다가 현장에 나와서 우리와 행동을 같이 했는데, 그래갖고 일행이 같이 가 갔고는, 중국에는 자동차 한 대가 없어요. 교통편이 없으니까 호남성 의용대 대부분이 계림에서 출발해 가지고 하남성 낙양까지 도보행군을 했어요. > >Q : 아, 걸어가셨습니까? >김승곤 : 걸어가지 어떡해요. 걸어갈 수 밖에. 도보 행진을 할 수 밖에. 광복군 2구대가 호북성 … 호북성 노하구, 늙을 노(老)자, 물 하(河)자, 입 구(口)자. 그 지명이라요. 거기 있었어요. 지금 거기서 우리를 잡을려고 그래요. > >Q : 일본군들이요? >김승곤 : 아니 한국 사람. 조선의용대 2구대가. 거기서 우리를 잡을려고 그래요. 우리는 산서성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낙양을 향해서 행군을 해가지고… > >Q : 잡을려고 한 이유는 같이 행동을 하자 그런 뜻으로 그랬습니까? >김승곤 : 그렇지요. 그런데 2구대는 허정숙이 알지, 허정숙이, 허헌이 딸, 최창익이 고려공산당 한빈, 이런 사람들이 거기 있어요. 거기서 우리를 완전히 공산주의자 만들려고 … > >Q : 그때 그러면 그 2구대가 공산주의 계통인 줄 … 왜 활동을 같이 안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승곤 : 김원봉이가 독립운동 최초에 일본놈 개새끼하고 친일파만 오지 말라 그러고, 그러고 친일파를 제외한 좌파를 끌어들였어요. 아, 자유주의하고 민족주의하고 좌파를 끌어 들였어요. 그래가지고 그해 가을에 들어왔을 거에요. 남경을. 그러고 얼마 있었는데, 이 놈들이 전부 빨갱이로 만들어논거여. 허정숙이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허헌이 딸로서. 공산주의자로. 그래가지고, 그걸 거역하니까, 우리를 붙잡을려고 해서 뿌리치고 우리는 낙양으로 간다. 낙양성에는, 거기 조선의용대가 좀 있어요. 거기서 일이 생겼어요. > >Q : 일이 생겼다구요? >김승곤 : 거기서 우리가 폭행을 당했어. > >Q : 일본놈의 폭격을 당했다구요? >김승곤 : 아니 폭행을, 김창만이 아세요? 이북 운수상까지 했던, 사람이 똑똑해요, 김창만이, 그놈들한테 우리가 테러를, 테러를 맞았어. 저희들하고 같이 안 했다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새서 여기 같이 못 있겠다고, 호북군 광복군 있는데, 그때는 이미 광복군이 생겼어요. 서안으로 가자. 비밀리에 회의해 갖고 깜쪽같이 결정해 놨는데 그 비밀이 깜쪽같이 샜어. 비밀이 새 갖고, 불리한 입장에서 우리가 수가 부족하니까. 테러를 당했는데 … > >Q : 그쪽에 수가 많았던 모양이지요? >김승곤 : 숫자가 많았지요. 그래서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거야. 그들의 목적은 연안으로 가는거야, 연안. 그런데 그자들은 우리 파를 하나 둘씩 해서 보내. 분산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왜 안 갔느냐? 조선의용대 제1구대 앨범을 못 보셨지요? 조선의용대 제1구대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 > >Q : 앨범을요? 아, 사진도 그 때 찍었습니까? >김승곤 : (사진 촬영하기가) 불편하죠. 사진 찍기가. 내 한 부 드리죠. 광복군, 아니 조선의용대 1구대가 그거 없어졌어요. 김창만이 그걸 가져 가 버렸거든요. 우리가 뺐겼지요.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데 … > >Q : 빼앗아 갔다는 것은 병력을 빼앗아 갔다는 말입니까? >김승곤 : 아니요. 그 조직체를…조선의용대 1구대. 김창만이가 가져 갔어요. 그냥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데, 둘씩 셋씩 방향없이 보내는 거에요. 그냥 연안으로 보내는 거에요. 그 조선의용대 앨범으로 보면 바로 알아요. 1938년 중국 한구에서 창립할 때 200여명인데, 그 중에서 나 하나만 안 넘어가고, 연안으로 안 넘어 가고 다 넘어갔어요. > >Q : 아 그렇습니까? >김승곤 : 조선의용군이 그랬어요. 그 사진첩이 있으니까,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 > >Q : 그런데 지사님께서 안 넘어가신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넘어갔는데 … >김승곤 : 있죠. 공산주의는 싫다 이거야. 나는. 그러면 끌려간 그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그랬냐. 아니야. 할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 많아요. 나같이 공산주의를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야 그때 저 사람들이 탐을 내지요. 중국말 잘 하지. 아, 체격 좋지. 활동력 있지. 그렇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결국 우리한테 테러를 시켰는데, 일주일동안, 일주일간 연금 당했어. >일주일만에 풀어주더구먼. 김창만이, 여보, 여보 오늘 저녁 같이 떠날 준비하라. 난 못가겠다 그러니까, 준비하라고 그래. 연안에 가서 무슨 체크가 있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는, 마음 놓게 하고는, 거기서 한 60명이 집단생활을 하데요. 점호시간을 틈타서 그렇게 마음 놓게 하고는 대낮에 뛰었어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편] 이런 사정을 체험한 김승곤 전광복회장이 생생하게 증언하는데, 조선의용대 안에서도 공산주의자, 좌익 독립운동 계열이 있다보니 장제스 총통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아닌 마오쩌둥이 이끄는 팔로군과 신사군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1941년 조선의용대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지아화(朱家驊)[*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참사관실 주임,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장, 당사무위원회 위원장, 중앙조사통계국 국장]가 장제스(蔣介石)에게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인원을 광복군(光復軍)으로 편입시켜주도록 요청한 첨정(簽呈)''' > >주지아화(朱家驊) >장총재(장제스)蔣總裁(蔣介石) > >31년(1942) 2월 11일 >첨정(簽呈)[* 서명 및 제출]:총재께서 전칙(轉飭)하여 빨리 광복군을 편성하여 훈련시켜주고 무기를 발급해 주고 급양(給養)을 원조해주라고 청하였습니다. 일전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金九)를 만나고서 보내온, 중국정부가 한국독립에 원조하는 문제에 관하여 종종 준쭈오(鈞座)[* 상사에 대한 존경받는 직함을 말함]께 절략을 올렸는데 문건에는 일컫기를 >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1ㆍ2ㆍ3각 구대 대원 전부가 자동으로 도하하여 북상한 후에 남은 소수 간부 10여인은 본래 한국광복군에 귀속되어야 할 것이고 혼합 조직하여 무장 통일을 꾀한다. 일전에 듣건대 군사를 주관하는 기관이 조선의용군을 새로 조직하여 한국광복군과 길을 나누어 아울러 진행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찰이 있을 우려가 있으니, 살펴서 소관 기관에 신칙하여 별도로 명의를 세우지 말아 군령의 통일을 기해야 한다. 아울러 김구 등이 책임을 지고 조선의용대의 잔여 간부인원을 접수하여 매우 공평한 방법으로 분별하여 광복군 대오 중의 상당한 지위에 편입시킨다. > >(2) 한국광복군이 공포된 법령을 따라 정식으로 편입된 이후로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 사령부에 편제되거나 사병으로 편입되어 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받지 못하였다. 이 태평양 전쟁을 만나서 일이 긴급한 전환점에 항전에 참가할 것이 아득히 기약이 없으니, 애타는 것을 어찌 견디겠는가! 살펴서 소관 기관에 신칙하여 빨리 편제하여 훈련시켜 주고, 무기를 발급하고(이미 훈련을 받은 자) 항전대오에 편입시켜서 활동을 시작하는 데에 편하게 한다. 아울러 간청하니 다달이 광복군 현재 인원의 급양을 접제(接濟)[*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을 차려서 살아 나갈 방도를 세움.]하여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한다. > >(3) 한국광복군이 항전에 참가하며 전후에 우리나라가 독립하며 신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등의 큰 문제에 대하여 > >준쭈오(鈞座)를 직접 만나서 진정을 말하고 지시를 청하며 따름이 있게 하시고 중국의 최고 영수이며 동아시아 맹주의 위대한 계책을 국내외의 한국 전체 민중에게 포고하여 지향할 줄을 알게 하고, 총동원하여 항왜전선(抗倭戰線)에 참가하게 하며, 이로써 민주전선의 승리와 우리나라 독립 자주의 최종 목적의 달성을 기대 합니다. 저의 마음을 생각하시어 속히 뵙게 할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등의 말이 있어, 조선의용대 인원들의 복잡한 것을 조사하였는데 다수 대원들이 마침내 공산당 대오에 들어간 것이 사실입니다. 연래에 한국 동지들 사이의 뜻이 집중되지 못하며 그 단결과 통일을 촉진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좌경분자에게 이용을 당한 소치입니다'''. 김군(金君)[* 김원봉]이 청구한 의용대(義勇隊)의 소수 인원을 광복군(光復軍)으로 돌려 넣어 정리한다는 것은 필요한 듯합니다. 광복군이 일찍이 승인을 받아서 성립된 것이 이미 1년 반 남짓하여 한국 인민들의 기대가 매우 크고, 미국에 타향살이하는 한국 교포들은 이에 대하여 더욱 중시할 것이거늘, 더구나 태평양 전쟁이 긴급하고 한국 혁명이 발동되는 것은 실로 부디 필요한 계획입니다. 그 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청한 것을 도와줄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군사위원회에 맡겨 이전의 명령을 따라 신속히 절실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또 김군(金君)은 혁명 사업에 분주하게 애쓴 지 30여년에 충성으로 나라를 위한 것은 그 마음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요청한 면담 한 가지 일은 만나주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니, 시간이 있을 때에 가부를 전해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총재 장(蔣)께 삼가 올립니다. > >직(職) 주지아화(朱家驊) 삼가 올림, 31(1942)년 2월 11일 보냄(發) 당시 잔류파 조선의용대의 심각한 사정을 볼 수 있는데, 만약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지 않는다면 굶어죽는 형편에 있었을 것이고 백범 김구또한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조선의용대 편입을 마다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