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제 1지대 제 2구대 | 이소민(李蘇民) 부대, 舊 [[조선의용대]](잔류파) ==== [[파일:한국광복군 활동지역(1지대 2구대).png ]] 제 2구대는 제 3전구 [[https://zh.wikipedia.org/zh-tw/%E9%A1%A7%E7%A5%9D%E5%90%8C|구주통]](顧祝同)사령장관의 제3 전구 지역인 저장성(浙江省) 찐화(金華)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이소민(李蘇民)을 구대장으로 하는 제2 구대는 [[조선의용대]] 시절부터 그 지역에서 현지 중국군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초모·선전·첩보 공작 및 포로 심문·적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군으로 개편될 당시의 구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3&levelId=ij_009_0010_0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9D%8E%E8%98%87%E6%B0%91&searchKeywordConjunction=AND&fbclid=IwAR1q0f0ZTBoymhbeNFRS096LzFAf_oZSf9pigAQ6yBNNeWIZwFGRwmyonqU|제 2 구대 편성표]]''' || 편제 || 인원 || 계급 || 직원성명 || 연령 || 국적 || || 구대장 || 1 || 소교 ||이소민(李蘇民) || 36 || 한국 || || 구대부 || 1 || 상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15|강진]](康晋)[* 강홍구] || 30 || 한국 || || 서기 || 1 || --중위-- ||--김지강(金志剛)[* 이지강(李志剛)으로 화북 옌안으로 합류]-- || --27-- || --한국-- || || 제 1분대장 || || ||선우국풍(鮮于國風) || 25 || 한국 || || 제 2분대장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6|성현원]](成玄園)[*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재정부장, 생몰년도 확인불가 ] || 46 || 한국 || || 제 3분대장 || || ||--문정일(文正一)[* 화북 옌안으로 활동]-- || --29-- || --한국-- ||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찐화(金華) 지구를 근거지로 하여 전방 공작을 수행하던 중 제 3전구 사령장관부의 지시에 따라 왜군에 의한 침공 작전, 특히 [[https://zh.wikipedia.org/zh-tw/%E6%B5%99%E8%B5%A3%E6%88%98%E5%BD%B9|절감작전]](浙贛作戰)[* 절(浙)는 저장성(浙江省)을 의미하는 한자, 공/감(贛)은 장시성(江西省)을 의미하는 한자로 저장-장시전투라고 부른다. 두리틀 특공대가 일본에 폭격을 하고 저장성에 불시착을 했는데, 일본제국이 항저우로 상륙하여 감행한 전투이고 협상을 위해 다수 미군 조종사들을 포로로 잡아 수용했던 걸로 보인다.]에는 항전하는 현지 중국군을 도와 대적 심리 작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김문호(金文鎬)가 인솔하는 광복군 징모 제 3분처가 파견되어 오면서는 때로 알력과 대립의 현상을 나타났으며, 따라서 공작 활동이 일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 이소민(李蘇民) 이하 간부 전원이 분발하여 직접 적 점령 지구에 내왕하면서 활발하게 초모 공작을 전개한 결과, 1944년초에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78|김용]](金龍)[* 개명 전 본명은 김순재(金珣裁)]·김여재(金如載)[* 김용의 친형]·박시준(朴時晙) 등이 금화(金華)의 광복군 진영으로 왔다.[* 관련수기를 찾아보고 싶다면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참조] >당시 2구대 사정은 7, 8명의 대원과 같이 제 3전구 사령부에서 공급해주는 군량과 봉급을 받아다 호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154] 1944년 6월, 장쑤셩(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주둔한 일본군내의 한국 학도병 출신 일본군 소위(少尉)[[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804|성동준]](成東準)·[[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7|김영남]](金映男) 등과 접촉이 되어 이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804|성동준]](成東準)·[[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7|김영남]](金映男)·유재영(柳在榮)·[[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37|박영]](朴英)·최덕룡(崔德龍)·정병훈(丁炳薰)·김봉옥(金鳳玉) 등이 무기를 휴대하고 읿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오게 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 충의구국군을 통해서 입대했다고 한다.] 난창(南昌) 지구에서는 김응전(金應篆) 등 수명이 정보 수집 및 초모·선전 공작을 전개한 결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56|윤우현]](尹宇鉉)·유재영(柳在榮)·[[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430|박종선]](朴鐘善)·김득만(金得萬)·[[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195|박병두]](朴炳斗)·김대준(金大俊) 등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진영으로 가담하게 하는 데 개가를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중국 각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도 되었다. 특히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출신인 관계로 제 3전구 내에 많은 선배·동창·후배 등이 있어서 섭외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구대장 자신이 중국군 상교(上校)[* 국민혁명군 대령]로 중국군에도 군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의 연결이 잘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 활동은 다소 소홀한 감마저 있었기 때문에 지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1944년 9월경에는 다시 일본군의 소위 소탕 작전으로 인하여 구대 본부를 강서성 옌산(鉛山)으로 옮기었고, 1945년 초에는 이소민(李蘇民) 자신이 전방 공작에 나서서 얼마동안 구대장의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2월경에는 제 3전구 사령장관 [[https://zh.wikipedia.org/zh-tw/%E9%A1%A7%E7%A5%9D%E5%90%8C|구주통]](顧祝同 상장(上將)이 중국 군사위원회로 제2 구대장 후임 문제를 조회(照會)한 일도 있었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11&levelId=ij_011_0010_006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C%86%8C%EB%AF%BC&searchKeywordConjunction=AND|'''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에 관한 전문電文''']](1945. 1. 22) > >제 3전구사령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 >1945년 1월 22일 >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에 알립니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는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의 직위가 해제된 이후 신임 구대장이 아직까지 우리 사령부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에게 보낸 전문의 답신을 보내니 참고해 주십시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5&levelId=ij_010_0020_0154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C%86%8C%EB%AF%BC&searchKeywordConjunction=AND|'''광복군 제1지대의 경비 지급에 관한 대전(代電)''']](1945. 5. 16) > >구주통(顧祝同) 제 3전구 사령장관 >군사위원회 > >1945년 5월 16일 >충칭(重慶) 군사위원회에 올립니다. 일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에서 이소민은 “한적(韓籍) 적병들에 대한 反正 공작을 강화하면서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해 7월부터 광복군 총부로부터 본대에 경비가 지급되지 않고 있어 현상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속하게 군사위원회에 연락하여 본대의 경비 분배를 책임지고 있는 주관당국에게 경비지급을 재촉해주십시오. 더불어 우선 급한 대로 15만 원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본전구에서는 이소민 부대에 15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속히 이소민 부대에 밀린 경비를 지급해 주기 바라며, 아울러 본전구에서 빌려준 15만 원도 갚아주었으면 합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