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배경 ==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해 8월 상하이에서 벌어진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D%95%98%EC%9D%B4_%EC%A0%84%ED%88%AC|송호회전]](淞滬會戰)와 12월 [[난징 대학살]]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 총통과 김구 주석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이와같이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급장교 양성과 1개 연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다는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군사위원회는 ‘속성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최단 기간 내에 초급장교 200명을 양성하고, 기본군대로 1개 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사업비로 37만 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당시 37만 원이란 금액은 임시정부 1년 예산의 65%에 해당되는 것으로 임시정부가 군사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국회도서관,≪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247쪽). ]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중국대륙 여러 곳으로 옮겨다녀야 했고, 계획한 군사활동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기강에 도착하면서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군의 창설은 한국독립당에 의해 계획, 추진되었다. 기강에서 3당이 통합[* 1940년 3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067|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던 세 당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지청천)이 한국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40년 5월 8일 3당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3.1 운동의 정맥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 정당임을 천명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체제로 운영되는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활동을 벌였다.]을 추진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주요 현안으로 결정하였다. 당이 추진해 갈 장단기 정책을 논의하면서 >“국방군(國防軍)을 편성하기 위해 국민의무병역을 실시한다”(당강 6조) >“장교 및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광복군을 편성할 것”(당책 3조)[*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3(1968), 405쪽.]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한 것이다. 1939년,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Fall Weiß / Polenfeldzug)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가 전시태세를 갖추기 위해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이 韓國光復軍(이하 광복군으로 약칭)의 창설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표하였다. >[[https://db.history.go.kr/id/dh_001_1941_12_09_0010|'''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擊敗)'''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거듭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히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血戰)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만주국|창춘(長春)]][*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의 개칭 이전 명칭이 창춘이다.] 및 [[왕징웨이 정권|남경정권(南京政權)]][* 중국 국민당의 요직을 역임했던 왕징웨이가 중일전쟁 후 1940년 일본의 도움으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별도로 난징에 세운 괴뢰 국가이다.]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굳세게] 주장하며, 특히 만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인), 외무부장 조소앙(인) >대한민국 23년[* 대한민국 연호로 1941년을 말한다. 1919년 3월 1일부터 대한민국 연호 시작이다.] 12월 9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