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제 2징모분처 ==== 1940년 11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41|공진원]](公震遠)[* 가오윈치(高雲起)라는 중국어 이름으로도 불리었었다.]은 시안(西安)에서 3개 지대로 편성될 때, 제 2지대장 겸 징모2분처(徵募二分處)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29|나태섭]](羅泰燮)·[[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7|고시복]](高時福)·[[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84|유해준]](兪海濬)·[[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52|지달수]](池達洙)[* 지청천 장군 아들]·이욕해(李慾海) 등을 이끌고 쑤이위안성(綏遠省)[*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몽강국의 일부이다.]의 바오터우(包頭)를 근거지로 전방 공작 활동을 전개했었다. [[파일:징모제2분처 위치.png]] 그런데, 현지에서 포섭한 교포 중의 한 사람인 최준(崔俊)이란 자가 처음에는 열성을 보이는 듯 했으나 점차 태도가 변하여 마침내는 일본헌병대에 자수하여 버렸는데,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제 2징모분처 간부들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적 헌병들에 의하여 체포당하기도 하고 필사의 노력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84|유해준]](兪海濬) 이때 체포되어 일본 규슈(九州)로 이송되었으며, 고쿠라(小倉)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3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제 2징모분처 군사특파단의 주요임무는 시안(西安)에 군사거점을 확보하고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한국광복군으로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 시안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1940년 11월 시안에 정착하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끝마쳤다. 1941년 1월 1일 원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 5지대로 편입되면서 기존에 제 2징모분처의 자리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사용하게 된다. 지청천 장군의 아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52|지달수]](池達洙)는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여성 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에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충칭에 귀환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