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광복군 창설(1940년 9월 17일) == || [[파일:FB_IMG_1474739838991.jpg|width=100%]] || [[파일:FB_IMG_1474742784289.jpg|width=100%]] || || [[1940년]] [[9월 17일]],[br][[충칭|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 1940년 9월 17일, 중경, 한국광복군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오찬장[br] 축사하는 [[김구]] 주석(중앙좌 검은 옷)과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우) ||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흔히 약칭해서 ‘광복군’이라고 불린다.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8|김구]] 명의로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고,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거행되었다. 창설 당시 총사령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69|지청천]](池靑天), 참모장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73|이범석]](李範奭)이 담당했다. >[[https://db.history.go.kr/id/ij_010_0010_00220|'''한국광복군 선언문(1940. 9. 15)''']]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元年)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蔣介石 元帥)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 >과거 삼십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전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사개년에 도달한 이 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영수 장제스 원수가 한국민족에 대하여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여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 >우리들은 한중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 계속불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 광복군 창설 준비는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군대를 편성할 만한 인적 자원이 없었다. 1920년대 이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등을 비롯한 각종 군관학교를 통해 양성한 군사인재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안춘생 국내정진군 구대장의 경우 송호회전에 참가하여 전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청천(李靑天)·이범석(李範奭)·[[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38|김학규]](金學奎) 등과 같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중국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군사간부들이었다. 실제 병력이 될만한 인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병력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청년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인 베이징(北京)·텐진(天津)·스좌장(石家莊) 등을 비롯하여 화북지역에는 약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葛赤峰,<朝鮮革命記>(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1), 114쪽. 韓志成,<目前環境與朝鮮義勇隊今後工作>(≪朝鮮義勇隊≫제37기, 1940. 5).] 이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한다는 것이 임시정부의 방안이었다. 1939년 7월 국무회의에서는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기구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구성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036|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은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군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그해 11월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으로 파견되었다. 서안은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특파원들을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여보내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자 한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징모활동(초모공작)으로 이어서 서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