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제 5지대 (1941.1.1. ~ 1942.7.31.) | 舊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439|한국청년전지공작대]] === >[[파일:582456-0.jpg ]] >제 5지대장 나월환(羅月煥) 지대장이며 징모 제5분처 주임위원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은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 8기 졸업생으로 중국군 헌병대에서 헌병 장교로 복무하다가 1937년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어 갈 때 대담하게도 칭따오(靑島)에서 탈출하여 본대로 돌아 왔다는 무용담을 지닌 용장으로서 몸매는 작으나마 의지가 강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파일:한국청년전지공작대_충칭.jpg]]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광복진선] 1939년 4월 4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8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연합하여 한국광복단체연합회 를 결성하게 된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광복진선)를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추진하게 된다. 1938년 9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41|공진원]](公震遠)이 대장에 취임한다.[* 민들레의 비상, 지복영 회고록에 따르면 정정화씨 책에는 노태준씨로 기록되어있는데 임시정부에는 제일 연장자가 대장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진선은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3.1절 기념공연, 위로금 모금공연 등의 선무공작을 시작으로 중국 학생군과 합동하여 대일항전을 벌인 청년단체다. '한중연합군의 연대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국경의 밤>을 통해 중국인 관객들에게 진정한 한중연대를 몸소 공감하고 체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청년공작대가 전개한 항일공연 예술 활동은 적은 수의 인원으로 최대의 선전효과를 누리고 입장권 발매를 통해 많은 수익금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항일선전효과와 파급력이 극대화된 투쟁방식이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64|한유한]]은 동포들의 광복군 지원을 촉구하고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극 ‘아리랑’을 1940년 5월 시안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https://youtu.be/hgXHFuls4Bk?si=jxKlP6QA-Qq-SXsm|관련영상]] >[[파일:83617263.1.jpg]] >1940년대 중국 현지에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을 공연하는 장면.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아리랑’은 목동과 촌녀 부부가 일본의 핍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유한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와 얼후, 징, 북 등 동양 악기 20여 개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소리를 냈다. 당시 출연진과 악단에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 예술가가 대거 참여해 한중 공동항전의 의미를 살렸다. 극중 곡들은 군가풍이 많았는데 클라이맥스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됐다. 한유한은 본래 작곡과 연출을 맡았지만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배우가 마땅치 않아 남자 주인공 역까지 해냈다. 공연은 매회 매진을 거듭한 끝에 기간이 연장됐고 장제스(蔣介石) 등 국민당 수뇌부가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https://youtu.be/giZ9oJlqkmE?si=4_2OZy-gYT8qVoUk|광복군 아리랑]] [[https://youtu.be/h9CzahtKvvc?si=PlEpJ2ycqKSF3wJc|스칼렛 합창단 광복군 아리랑]] >[[파일:83617271.1.jpg]] >1944년 3·1운동 기념과 중국군 부상병 위문 모금을 위해 개최한 제 4차 ‘아리랑’ 공연 포스터. 항일 공연예술 활동을 하고 그 수익금을 대일항전을 위해 기부받아 1939년 11월 11일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이후 한국광복군 제 5지대로 귀속하게 된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편재(1939년 11월)''' ||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 || ||부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 || ||군사조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48|박기성]] || ||정훈조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 || ||선전조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 ||예술조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64|한유한]] || >[[파일:한국청년전지공작대 1939년 11월 17일 수정본.jpg]] >이 사진 촬영 다음 날, 1939년 11월 18일 충칭을 떠나 시안으로 이동하여 중국군 후종난(胡宗南)사령장관이 있는 제 34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공작 활동을 펼쳤다. >3줄 왼쪽: 멍자오허(孟兆和)[* 중국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 핑지셩(平智盛)[* 중국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0101|김원영]].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172|조시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022|현이평]].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주지 >2줄 왼쪽: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48|박기성]]. 중국인 여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6920|허쉰치]](何尙祺)[* 중국인 여성]. 중국인 여성. 진쭤셩(金作生)[* 중국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844|엄익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 >1줄 왼쪽: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3|박영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388|엄항섭]].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504|박찬익]].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8|김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133|유진동]].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20|김인]][* 백범 김구의 장남] 제 5지대의 전신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약칭 : 광복진선]였는데, '''1939년 4월'''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 대장 인솔 하에 충칭에서 시안(西安)에 도착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는 30여 만 대군을 지휘 통솔하는 제 1전구 사령장관(第一戰區司令長官) [[https://zh.wikipedia.org/zh-tw/%E8%83%A1%E5%AE%97%E5%8D%97|후종난]](胡宗南)과 교섭 끝에 양해를 받고, 그 휘하 중국군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여 한·중 양국간의 군사 합작 추진에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기지를 개척하려는 기초 작업을 굳혀 갔다. 주요 임무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때처럼 적후공작과 대원 훈련이었다. [[파일:징모제5분처위치.png]] 시안(西安)은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이지만 비교적 일선이 가까운 군사 중심지이다. 이곳은 적 점령 지구에 대한 초모·선전·첩보·훈련 공작 등을 전개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다. 이 해 9월 임시정부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036|조성환]](曹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이곳으로 파견한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광복군 제 5지대 편재(1941년 1월 1일)''' ||지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 || ||부지대장 / 1구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 || ||훈련조 / 2구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48|박기성]] || ||정훈조 / 정치지도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 || ||공작조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 >[[파일:20190228200614422385_0_845_585.jpg ]] >'''한국광복군 제 5지대 성립전례기념 대한민국 23년(1941년) 원단(1월 1일)'''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1941년 2월 1일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된 뒤에 해내 해외의 한족은 모두 향응하여 용약 참가하였다. 한국 혁명 진영의 추세는 날로 통일되어 혁명 역량은 더욱 집중 되었으며 각지의 한국 무장 부대는 모두 광복군 총사령부 지휘 밑에 집결되었다. >여기서 모두 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역시 한국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였는데 이미 금년 원단 서안(西安)의 이부가(二府街)에 있는 대의 본부 대례당에서 성립 전례식을거행하였으며, 정황이 퍽 열렬하여 전례에 출석한 자는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의 전체 직원과 그대의 전체 대원 및 내빈 함께 2백여 인을 계산하게 되었다. 벽두에서 대회의 주석 황학수 선생이 광복군 제5 지대가 성립되는 의의와 광복군의 임무를 강술하고 뒤에 그대의 대장 나월환(羅月煥)이 서사(誓辭)를 선독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曹成煥) 선생의 치사와 내빈 송수창(宋壽昌) 선생 및 이웅(李雄) 선생의 축사가 있었고 끝으로 나(羅) 대장의 답사가 있은 다음 전례식은 성공리에 산회하였다. >그대의 과거 성적은 퍽 아름다운 것으로 이번 개편을 거쳐서 금후 광복 사업에 대하여 더욱 공헌할 것이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 대장은 이곳을 기지로 정하고 제1차적인 초모·선전 공작을 펴기 위하여, 일본군 점령 지구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金天成)을 앞장 세워,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동수]](金東洙)·[[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해평]](李海平)등 수명을 중앙군 유격대의 협조 아래 산시성(山西省) 루안(潞安) 방면으로 파견하여 결사적인 공작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반 년미만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33|이도순]](李道淳)·[[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13|장철]](張鐵)·[[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70|문응국]](文應國)[* 인면전구공작대 부대장]·[[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00|나동규]](羅東奎)[*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97|최봉진]](崔俸鎭)[*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66|김상준]](金尙俊)[*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송철(宋哲)[*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53|김성호]](金成浩)[*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89|장덕기]](張德棋)·김형철(金亨哲) 등 5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을 시안으로 인솔하여 오는 데 개가를 올렸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이렇게 초모 공작에 성공한 이면에는 루안(潞安) 교민 회장 박춘섭(林春燮)의 공로가 컸는데, 그는 당시 그곳에 있는 일본 헌병 대장과 일본에서 대학 동기 동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원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충칭에 남기고 온 광복진선 대원들을 제외하고도 시안에 집결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은 이로써 1백 여 명에 달하였다. 이렇듯 인원이 급격히 많아지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시급한 사정은 이들에 대한 식량·피복·침구 등의 보급 문제였고, 또 이들을 수용할 병사(兵舍)와 그리고 교육 훈련을 실시하는 문제 등이었다. >[[파일:후종난.png]] >중화민국 제 1전구 사령장관 후종난(胡宗南) 이러한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 대장은 주요 간부와 같이 중국측과 온갖 방법을 다하여 교섭을 벌였지만 좀처럼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결국 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中央戰時幹部訓練團) 제 4단(=간 4단)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https://zh.wikipedia.org/zh-tw/%E8%83%A1%E5%AE%97%E5%8D%97|후종난]](胡宗南) 사령장관에게 이 방안의 협조를 진지하게 요청하였다. 우리 애국 청년들의 열렬한 독립 정신의 호소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드디어 [[https://zh.wikipedia.org/zh-tw/%E8%83%A1%E5%AE%97%E5%8D%97|후종난]](胡宗南) 사령장관의 승낙을 얻어, 제 4단내에 한청반(韓靑班)[* 한국 청년 간부 훈련반]을 특설하게 되었으며, 제 1차적으로 50여 명의 한국 청년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41년 1월 1일''', 한국 청년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 지대'''로 개편되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 대장이 지대장 겸 징모 제5 분처 주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봄부터 전시 간부 훈련단에 교관으로 파견되어 있는 간부 및 지대 본부 기간 요원을 제외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해평]](李海平)·[[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金天成)·[[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2|김용주]](金容珠) 등 간부 수명을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쩡저우(鄭州) 등지에 기지를 정하고 신샹(新鄕)·카이펑(開封)·타이위안(太原)·스좌장(石家莊)·베이핑(北平) 등지로 파견하여 주도 면밀하게 거점을 확보하면서 징모 제 5분처로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羅月煥)은 시안 본부에 있으면서, 대다수의 인원이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전시 간부 훈련단에 대한 교육 감독 및 지원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중국 당국과의 협조와 연락에도 정열을 쏟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