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나월환(羅月煥) 제 5지대장 암살 사건 ==== 1942년 3월 1일, 시안의 제 5지대 본부에서 나월환(羅月煥) 지대장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물론, 중국측에까지 큰 충격을 주었다. 나월환 지대장은 평소 후종난(胡宗南) 제 1전구 사령 장관의 신임이 두터웠고, 또 중국군 중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나온 동지 및 선후배가 많았던 만큼 이들의 분노 역시 말할 수 없이 컸다. 얼마 후에는 비참한 모습의 시체로 발견되었다. >충칭에서 분명히 돌아온 것으로 알았던 나월환이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후종난(胡宗南) 부대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폐정(廢井)[* 폐 우물] 속에서 그의 타살된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 >이렇게 되자 후종난 부대에서는 임시정부의 사이에서 얽힌 공작대의 내분에서 빚어진 타살사건으로 단정하고 간부 등 20여명을 체포, 군법재판에 회부하여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216] '''암살원인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는 5지대 대원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만큼 대원들 사이에 존경과 믿음이 두터웠었다. 이에 비해 나월환은 리더쉽에 있어서나 평소 행동에 약간 문제가 있어 대원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는 편이었다. 더욱이 나월환의 시기심이 강한 편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부 대원들 사이에 박동운과 같은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나월환은 공작대 이전에 중앙군 헌병대 중교[* 중령]으로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다. 당시 그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나월환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이 된 후에도 (여자친구가 그에게) 군복이며 용돈 등을 대주었고, 그래서 그의 사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대부분의 대원들은 된장국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형편이었고 그래서 나월환의 넉넉한 생활은 대원들의 감정을 자극하곤 했었다.[*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151] >정식으로 장가는 안 갔어. 그런데 나 대장이 일요일에 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자주 불렀지. 중국여자였는데 중국음식을 성의껏 만들어 내놓곤 했다. 부인으로도 볼 수 있고, 애인으로도 볼 수 있지, 그런데 둘 사이에 아기는 없었어.[* 박기성 증언] 중국군 수사 당국의 엄준한 조사로 인하여 암살 사건에 관련된 하수인과 관련자 등 8명이 검거되었다. 그 중 나월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대원들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48|박기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2|김용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448|박동운]][* 나월환 지대장 살해혐의로 중국현지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된다.]이다. >1942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은 5지대 본부에서 거행하게 되어있었다. 지대의 본부 요원들은 제 1, 2구대가 귀대하기를 기다렸다. 1, 2구대원들은 간 4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대본부와 간 4단과의 거리는 약 5km, 아침에 1, 2구대가 본부에 도착, 성황리에 기념식을 마쳤고 대원들은 해산했다. 자유시간을 갖게 된 대원들은 제각기 모처럼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대원들이 운동장에서 모두 빠져 나가고 나자 지대 본부에서는 정적이 감돌았다. 주위가 고요해지자 나도 차 한잔 들며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지대 본부 정문 앞의 끊는 물 파는 가게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게 얼마나 지났을까, 박동운이 헐레발떡 달려 왔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게 내뱉은 첫 마디는 "해치웠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눈 앞이 캄캄해진 나는 아무 댓구도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월환 사건은 이렇게 벌어졌다. [*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153] 그리고, 일 년 전 행방 불명이 된 젊은 독립 투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022|현이평]](玄以平)[*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15|현익철]](玄益哲)조카] 역시 이들의 범행임이 드러났다. 이렇듯 군의 규율을 문란하게 하고 상관을 살해한 하극상의 테러 행위는 군의 명령 계통과 단결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중국군 법무 당국은 전시 간부 훈련단내에서 군법 회의를 열고 범행자 들의 죄상에 의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448|박동운]](朴東雲)에게 사형 등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편, 나월환 지대장의 시신을 찾아낸 제 5지대에서는 군례장(軍禮葬)의 의식으로 장례식을 융중하게 거행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후임으로는 총사령부의 편련처장(編練處長)으로 있던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D%98%B8%EC%84%B1|송호성]](宋虎聲)이 제 5지대장(1942.3.2~1942.7.31)으로 취임하여 대원들에 대한 무마에 노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