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토교대(土橋隊) ==== 엄밀히 말하자면 토교대는 광복군 부대가 아니다. 특이한 성격으로 광복군 조직체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토교대가 있다. 토교대는 토교에 설치되어있었다. 토교는 중경시에서 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있는 곳으로 주로 임시정부 관련된 인사들의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다. >연월일 : 1945년 4월 3일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ij&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ij_012_0020_00400&position=-1|'''싸전트의 한국인 마을 방문''']] > >1945년 4월 3일, 본인은 그들이 초청한 계획대로, 중경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거리의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간선 도로상에 있는 토교(土橋) 한인 마을에 함께 갈 수행원 몇 사람을 동반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본부로 갔다. 그 일행은 이청천 장군, 이범석장군, 김학규 소장, 정환범씨, 그리고 최근에 일본군에서 탈주하였거나 안휘(安徽)에서 충칭(重慶)으로 온 대한민국 광복군 소속 요원 몇 명이다. 토교에서 우리는 민석린(閔石麟), 이 대령(1924년 운남강무당 졸업), 공보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388|엄항섭]](그는 자기 이름을 David H. S. Um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133|유진동]](劉振東) 박사(그는 자기 이름을 Dr. New Pillten으로 서명하였고, 그의 명함에는 한인청년학교 극동지부 보건위원회 회장으로 기재되어 있음) 등과 합류하였다. > >여행의 목적은 두가지 였다. 하나는 '''토교'''에 있는 '''한국인 마을'''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휘에서 최근에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 >'''한국인 마을은 약 3년 전에, 부분적으로는 중경 임시정부 요원들의 가족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경에 대한 극심한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토교에 설립되었다. 마을에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부녀자 및 어린아이들 약 8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는 안휘에서 온 37명의 한국인들도 숙소를 배정받아 거기에서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4개의 건물동으로 구성되어 간선도로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토교에 있는 큰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고, 중국 군용주차장으로 운전해 들어간 뒤, 바위언덕을 오르면 마을에 다다를 수 있다.''' > >유진동의 부인이 제공한 한국식 점심을 먹은 후, 본인은 한국 군인들에 대한 짧은 연설을 요청받았다. 이범석 장군에 의하여 소개를 받은 후 본인은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약 8분 동안 연설을 하였고, 정환범씨가 이를 통역하였다. 본인의 즉석연설에 이어 전체가 한국 군가와 애국가를 불렀다(본인의 요청으로). > >본인은 안휘에서 온 37명의 한국 군인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 모두가 지적이고, 기민하고 빈틈이 없었다. 본인이 본 군인 집단 중에서 가장 지적인 집단이었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능력은 어떤 미국 청년 장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들이라고 들었고, 그들 중 몇 명은 영어를 곧잘 했다. 중경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본인은 그들 중의 몇 명과 격식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본인은 이범석 장군에게 그들 모두를 독수리계획의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키기 위해 산시성(陝西省) 두취(杜曲)으로 데려올 것을 제안했다. 토교대는 광복군 편제 상의 상설조직은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경에도 일본군 탈영병과 한광반 출신들 중국군 포로된 한적사병 등이 토교에 집단 수용되었다. 이들은 일정기간 수용되어 광복군총사령부로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총사령부, 지대, 경위대 등으로 배치되었다. 즉, 토교대는 한인 청년의 집결에 따라 그때 그때 임시로 편성되는 비상설조직이었다. >토교대의 임무 >①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 >② 광복군 기간 간부 및 장차 건국 후의 국군 사관 요원의 양성 >③ 일본군내의 한적 사병에 대한 탈출 공작 >④ 기타 총사령부의 지시에 의한 공작 수행 대원들은 이들 가족에 대한 보호와 민사 업무 등도 수행하면서 ''''교포 위안의 밤' '''등을 열어 이역에서 외롭게 고생하는 이들 가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복돋우어 주기도 하며, 나이 어린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민요와 가요곡 등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중국 국민에 대한 선무 공작의 일환으로 연극과 음악에 소질이 있는 대원 20여명을 선발하여''' 군예대(軍藝隊)'''를 조직, 중경과 인접 현성(縣城) 등지를 순회하면서 ''''일본군 탈출기'''' 등의 연극과 우리나라의 민요·가요·민족 무용 등을 공연하여 항전 8년, 일본군에게 시달려 온 중국 민중의 사기 앙양과 한·중 양 국민의 우의 증진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 운동에 소질이 있는 대원들을 뽑아 '''체육부'''를 구성하고, 충칭시(重慶市)를 중심으로 한 각 사회 단체 또는 대학생들과 친선 경기를 가지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체력과 구기(球技)의 우수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을 토교에서 맞은 당시의 토교대는 대부분이 광복군 제 1지대에 편입되어 환국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