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 1943년 말,[* 1943년 10월 1일 제 3징모분처가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개편 소식을 듣고 한중합동유격대를 전시공작대로 재편했을 것이다.] 전열을 정비하여 유격대를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 개편하고 일본군과 왕징웨이군과 공산군과의 대결에 대비한다. 상라오(上饒), 젠양(建陽)을 중심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로 조직되었다. 이들을 일괄수용하고 중국군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에서 군사적 공격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훈련을 실시하여 힘을 키우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인 병사들이 저장성에 있는 일본군대에서 탈출해오는길은 >[[파일:난징부양.png ]] >① 난징(南京), 자오장(鎭江)방면에서 우후(蕪湖)나 푸양(阜陽) >[[파일:진화 상라오.png ]] >② 찐화(金華)에서 상라오(上饒)나 젠양(建陽)으로 넘어오는 일이었다.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와 미 5공군(5th Air Force)의 합동작전 1944년 11월'''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미 5공군 사령부에서 상라오(上饒)에 분소를 두고 일본군에 대한 폭격자료를 얻기 위한 정보수집업무의 일부도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가 수행했다.[* 김문호가 이끄는 제 3징모분처(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 정화암의 전시공작대는 거의 같은 지역에 있어서 공작협조를 서로 같이 해야하는 상황이라서 공훈록이나 국가보훈처 발간 자료를 보면 거의 겹치는 경우가 많다.] 젠양(建陽)과 상라오(上饒)는 장시성(江西省), 안후이성(安徽省), 푸젠성(福建省), 저장성(浙江省)의 중심지였고 구주통(顧祝同) 군단의 제 3전구가 있는 중요지점이다.또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미군 5공군 사령부에서 상라오(上饒)에 분소를 두고 일본군에 대한 폭격자료를 얻기 위한 정보수집업무의 일부도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에서 수행해야 하는 과업의 하나였다. 미국 공군기가 일본군 주둔지를 폭격함에 있어서는 그 주둔상황을 관한 정확한 정보에 의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정확한 탓으로 연합군의 포로수용소가 잘못 폭격되어 많은 희생을 초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공군 사령부에서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 5 공군의 상라오(上饒)분소 정보책임자 쇼우가 정화암에게 사람을 보내 정보 수집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중국정부의 정보나 각 군의 정보를 종합해도 신빙성이 없다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나와 손을 잡으면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정보 수집을 의뢰해 온 것이다.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서는 침략자 일본군을 통쾌하게 때려 부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므로 쇼우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미 5공군에서 알고자 하는 정보는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등 화북지방으로부터 상하이(上海), 항저우(抗州), 우한(武漢) 지방 등에 있는 포로수용소 위치였다. 그 중에서도 상하이(上海)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아는 대로 유격대를 보내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합군의 포로를 단시간 내로 안전지대로 빼내야겠다는 것이다.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부대 가운데 우리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가 가장 건실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병사의 수효가 많아 신빙성이 있는 정보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정보업무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마침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대원들의 의식주와 훈련 등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했던 때인지라 여기에 필요한 자금까지 요청해 볼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것은 흑심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판단에서 정보수집에 필요한 금액만을 자세한 계획서와 같이 제시 하였더니 쇼우는 깜짝 놀라며 >쇼우 : “이 돈으로 충분 하겠느냐?" >정화암 : “쓰다 부족하면 또 청구하지요.” 쇼우는 솔직한 정화암의 태도에 호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청구한 돈과 같이 지프(Jeep) 한 대를 보내 왔다. 그리고 정화암 포로수용소의 확인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암호문이 쓰인 얇은 비단 쪽지를 포로수용소라고 인정되는 곳에 비밀리에 들여보내면 회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연합군의 장교라면 대개는 그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다.” 정화암은 항저우(抗州)에서 백리길이 넘는 동요라는 최전선까지 나아갔다. 거기에서 대원 두 사람을 상하이(上海)에 밀파하여 정계원을 불러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계원은 매우 반가워했다. 정보임무의 막중함을 이야기하고 위혜림을 찾아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혜림으로부터 신통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화사창이니 영미사창이니 하는 큰 공장에 수용되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비단쪽지>를 들여보내려 했으나 불가능했고 쇼우에게 알렸더니 그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 5공군 사령부에서는 정보 수집을 한 군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비단쪽지의 회답만 얻어 오면 틀림없다고는 하지만 일본군 몰래 들어가서 회답을 받아 내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는 상하이(上海)와 항저우(抗州), 우한(武漢)지방을 중심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새로 일본군에서 탈출해 오는 학병과 군속들에게서 아는 대로 정보를 듣고 이를 종합하여 쇼우의 지시대로 비단쪽지를 들여보냈다. 그 결과 우한(武漢)지방의 한 촌락의 일본군 부대였다. 다음 날, 새벽에 그 비단쪽지가 되돌아 왔다. 그 곳은 분명히 포로수용소였다. 쇼우에게 알렸더니 ‘이제 됐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우는 그곳을 공격하지 않고 한 일주일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곳의 일본군 병력을 조사한 것이다. 정작 일본군의 큰 병력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커우(漢口)와 자오장(九江)에 있었다. 그 후에야 미 공군기가 그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수용소를 유격대가 공격하여 그 수용소 안에 있던 연합군 포로를 빼내오는 것이다.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의 활동은 쇼우와의 합작으로 그 후에도 계속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