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광복(光復) - 1945년 8월 15일 == 미 전략사무국 중국전구에서는 1945년 8월 8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으며 백범 김구와 제 2지대 본부 그리고 임시정부와 총사령부에서는 8월 9일날 그리고 중국 정보기관과 함께 공작하는 부대들은 8월 10일에 일본제국주의가 항복할 것을 알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을때는 중국전역에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는 등 축제 분위기라 당시 광복군 대원들이 해방됨을 알았다고 한다. 김승곤 지사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갑자기 일본놈들이 투항해 왔습니까? >김승곤 : 일본놈들이 중경서 해악''' 8월 9일 밤에 알았어요.''' 8월 15일에 해방이 됐지만. 그런데 8월 9일날 알았는데, 참 허망합디다. 일본놈들 우리 힘으로 같이 한 번 싸워보다가 투항해야 힘이나 있는데, 그래 가지고 14년이 되었지만, 생활을 위해서는 내가 안 나왔죠. 중경에서 본부중대 중대장을 해서우리는 훈련시키는 도중에 일본놈들이 갑자기 투항을 해 와서 전쟁이 끝났거든요. > >8월 9일날 일본놈들이 투항하면서 일본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단 말씀이지요? >김승곤 : 그렇지요. '''8월 9일 투항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그 때 말이 중경 사회에는 퍼졌다구요.''' 일본놈이 투항한다. 중국에서 오래 기다렸다구요. 그래갖고 광복군의 후속조치가 있잖아요? 그 처리하고 오느라고 그 다음해 6월달에 한국을 나왔거든요. >1945년 8월 15일 나는 환남(晥南)의 휘주(徽州)에서 도보 중에 일본 침략자가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펄쩍 뛰었다. 40세까지 살면서 이렇게 속이 시원한 경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미 미루어져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중략) '망국민'의 굴레를 빠져나와 진정으로 인생의 맛을 보는 것 같았다. 이후로 더 이상 누군가 우리를 가리켜 망국민이라고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 334] 반면 많은 한인교민들이 중국 상해와 남경일대로 강제이주를 당했었는데, 광복 후, 재산처리 문제에 관하여 적산처리위원회를 설치해서 중국정부와 같이 정리에 힘쓴 모습이 보여진다. >이소민이나 김문호는 광복군의 제복을 입고 그야말로 의기양양한 개선장군의 기풍으로 우리 교포들은 물론 중국인들로부터도 굉장한 환영을 받았다.[* 1945년 9월 말에 상해에서 퍼레이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상해에 도착한 후에 몇가지 실수를 범했다. >자기들이 임정의 근위사절이라고 자칭하면서 교포사회의 치안과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노력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일제에 협력했던 교포들의 가옥이나 재물에 딱지를 붙이고 함부로 처분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인의 재산도 포함되어있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중략) >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비웃고 방해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이제는 자기들이 애국자였고 또 독립운동가였던 것처럼 날뛰는 걸 볼 때,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라왔다. > 이소민이나 김문호가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자칭 급조 애국자들은 우리가 헐벗고 쫒기고 끌려갔을때 일본에 빌붙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 모으다가 이제는 그 돈으로 세상을 요리하려 들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중국정부로부터 행정관이 임명되어 오고 군대가 들어왔다. 상해에 모든 기관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운영되었다.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하여 적산처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우리 한국인의 소유재산은 우리 교민단의 의견을 들어 처리했다. 교민단에서 몇 사람의 직원을 적산처리위원회에서 파견하여 우리 교포재산의 처리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중국정부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외의 외국인의 귀국에 따른 선박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중국 내지로 피난갔던 우리 교포들이 귀국하려고 상해로 몰려들었다. [*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9~231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