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가짜 광복군 논란 === 서훈 잡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① 친일파 서훈 >② 5단계로 나뉜 건국훈장 등급 >③ ‘가짜’ 또는 ‘자격 미달’ 광복군이다. [*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들어온 일본군 한적사병, 교민이거나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들어왔어도 중국군 포로가 되어서 들어왔거나 하는 등의 광복군을 말한다.] 광복군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에 가까웠는데, 나중에 후술할 철기 이범석 장군의 숙군(肅軍)사업 과정에서 무분별한 양민학살 및 군내 좌익분자 숙청하면서 동시에 진행한 김구파 광복군들을 숙청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때도 진행이 되었으니 군, 경찰 내부의 요직헤 있던 김구파 광복군 출신들은 수기를 남기지 않고 조국에 대한 염증만 안고 있는채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이 당시엔 간첩으로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취직이 되지 않았다. 아나키즘, 공산주의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말을 하면 부대가 빨갱이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해방 후, 제 1지대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의 월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하게 되냐면, 조선의용대하면 공산군대로 착각하고 그 조선의용대가 1지대 출신으로 이뤄지니까 광복군의 붉은 군대로 오해받는 경우이다. 2020년대인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제대로 솔직히 말하기가 힘들다.]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때는 입조심을 해야하는 경우도 많았거니와 또 시간이 지나면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기억착오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1960년 7월 29일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화암 선생은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때 정화암은 곽상훈으로부터 사상공세를 당하게 된다. 곽상훈은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던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곽상훈은 상대방 후보인 정화암을 사상으로 공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정화암 선생은 거물급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의 수기가 만들어진 것은 그가 사망한 1981년이 지난 1년 후나 되어서야 나오게 된다.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도 없고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조차도 반공이념 논리에 뭍히고 사람들이 따라주니 말이다. 독립운동의 거물급도 이런데, 그 밑에서 일했던 대원들의 수기는 말할 것도 없이 역사 속에 뭍히는 경우가 많다. 광복군 숫자에 과장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기존의 광복군에 '해방 후 광복군'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이들 중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039645?sid=115|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다.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명, 1지대 89명, 2지대 185명, 3지대 119명,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08597?sid=114|#]] 특히 광복군의 확군 정책에 의하여 일본군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시정부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광복군 논란은 토교대(土橋隊)을 비롯, 비호대(飛虎隊)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 밀리터리 동호회 가면 토교대, 비호대, 제 3지대를 마치 광복군 중에서도 특수부대처럼 환상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정도이다.] >그 무렵 상하이에는 항전지구에서 독립운동하다 왔다는 사람과 윤함지구(일본군 점령지)에서 지하공작을 하다 왔다는 하는 정체불명의 투사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서 "동포여,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고 떠돌아다니면서 임시정부를 팔아대고 있었다. 누구를 알고 누구와 같이 독립운동 했다고 약장수 고약 팔듯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놀아나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부지기수 늘어나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투사들이 임시정부의 누구를 알고 누구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그 명사의 이름은 우리는 물론 오래된 상하이 교민들도 아는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사기꾼들임이 분명했다. 체포하려고 수배하자 36계(도망) 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모두가 홍커우 쪽에 사는 신 상하이 교포들을 상대로 사기치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일제 치하 교관 하나만 잘 사귀면 일확천금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있는 일부 신 상하이 교포들 중에는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속이고 속고 이용하려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직전 혹은 직후 일제가 패망하였으니 광복군으로 사칭해도 전투할 일은 없고 주로 광복군 지위를 이용하여 귀국할 때, 한자리 해볼 생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광복군 제 1지대 2구대장 이소민 상교의 저장성 공작대장이라고 하는 전○○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이소민 상교가 아니고 장군이라고 하며 우리가 광복군 제 1지대 2구대 이소민 장군의 소속이라면 자기 직속상관의 계급은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상하이는 저장성 공작대 산하에 있는 만큼 공작대장인 자기에게 허락받지 않는 상해판사처는 인정할 수 없다는 얼토당토 않은 모략을 하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 >그 정체를 수소문해 보았더니 1945년 4월 하순경 17명이 난징을 탈출하여 동년 5월 제 3전구 꽝더쎈마오린(廣德縣茂林)[* 지명도 틀린 것이 징쎈 마오린(涇縣 茂林)이다.]에 와서 반일공작을 구상 중일 때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빈손 들고 돌아가게 된 신세를 어디다 하소연 할 데가 없어 전○○은 동대 저장셩 특파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전○○은 저장썽 어디에 연고를 둘만한 곳이 없어 상하이에 와서 상하이에 자기 관할이라고 행정구역조차 구별할 줄 몰라 망발하고 다니다 상하이 교포들에게 호되게 욕을 보고 난징으로 도망쳤다. > 그 외에도 항일지구에서 해방 후, 상하이에 와서 남의 일에 훼방이나 하고 흑색선전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을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일부 독립투사들이 상하이임시정부를 찾아와서 자기 개인 중심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열을 내서 남을 헐뜯고 욕하던 때와 심지어는 왜놈의 스파이로 몰아붙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며 세상의 온갖 추잡한 소문을 내서 모함하고 망신을 주던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판사처에 모여 앉아 한창일때 오래된 상하이 교민들은 옛날부터 항상 듣던 말들이라고 흥미를 두지 않고 있었지만, 새로 온 상하이 교민들에게는 처음 듣는 말들이라 흥미를 느끼고 귀담아 듣느라 점심때를 잊고 판사처 한쪽의 자리를 비워줄 줄 모르고 있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년 pp. 213~214]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서훈 이후에도 죽을때까지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사후 또는 2010년 넘어서 유가족들이 출판하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살아 생전에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그걸 이용해서 개명하면서까지 사기꾼들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를 사칭한 절강성 공작대였고 이소민 상교[* 대령]의 계급도 모른채 순수 자기 상상력에 의존해서 사칭한 케이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