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미군정의 의도 ==== 미군정은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에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을 우대했다. 광복군/독립군은 중국전구에서 500명에서 많아봐야 1000명의 대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했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광복군 내에서도 공작활동했던 사람들은 통일된 피라미드 조직보다는 점 조직[* 광복군 총사령부와 제 2지대 국내진공대를 제외하고는 초모공작에 있어서 피라미드식으로 운영하다가 일본 경찰이나 일본군 헌병대에 일망타진하게 되기때문이다. 특히 부양에 본부를 둔 광복군 제 3지대는 당사자나 유족이 설명하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으로 운영했었는데, 미군정 입장에선 한국국민을 통치해본 친일파 및 일본인을 기용을 해야 한반도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 송호성 장군과 이범석 장군을 제외하면 경비대사령관은 전부 일본군 장교 출신이고 그나마 김구 파벌인 광복군 출신 송호성 장군은 여론때문에 잠시 모셔졌을 뿐이지 우대한 것은 아니다..] 1946년 5월 1일에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7913|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가 개교하였다.[* 현재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자리이고 그 전에 군사영어학교는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에 있었다.] 미군정 초기에 미국은 소련과의 갈등을 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 내 반전여론도 있었고 소련과 직접 전쟁하게 된다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1945년 11월, 당시 여론조사에서 1등 한 유력 정치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었다.[[https://youtu.be/ha97vNaKg7I?si=xu-b0gnw_Juh9Mq1]] 미군정 입장에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지 않는다면 한반도가 공산화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많이 작용되었던 걸로 판단된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에 정규군 대신 기존의 경찰[* 23,000명 규모였다.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경찰이 그대로 인수되었다.]에게 치안을 맡겨두었고 이는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찰예비대였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아니라 폭동진압훈련 등 경찰과 비슷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장교들이 대부분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었기에 실제로는 군대식으로 훈련이 치러졌다.[* 백선엽은 각개전투 등을 시킨 탓에 경찰처럼 훈련하라는 미국 고문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미군정도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었다. 1947년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소련과 관계가 틀어지자 남조선 국방경비대(南朝鮮 國防警備隊)가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으로 탈바꿈하는 걸 묵인했다. 과거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은채 반공투사 및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대로 세탁하게 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육군 내에 친일파들을 기용하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나라 극우 보수세력들이 [[건국절]]을 1948년으로 잡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문제는 1948년 건국절로 잡는 경우 임시정부와 대한제국 간의 법통의 승계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3.1운동 이전과 이후에 상해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들이 수립했었고, 이것이 1919년 9월에 들어서서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써 1919년을 시작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