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광복군 지휘부 ===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8|김구]]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 공포됨에 따라 대일항전에 진력을 다하였으며 연합군과 함께 중국 각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主席)으로 임명되었으며,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과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69|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0036|약산 김원봉]]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1919년에 의열단 조직하여 요인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 투쟁을 이끌었다. 해방 후,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력했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께서 혜화로타리에서 암살되자 백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국가보훈부 내규에 따라 북한정권에 협력한 사람은 공적 인정이 안되지만, 몇몇 황포군관학교 동기의 증언이나 실제 공산주의자였다면 공산주의자는 일본군보다 더 싫어하는 장제스 총통에게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는 국가보훈부 내규[* 북한에 협력한 사람은 공적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공훈록이 없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73|철기 이범석]] 광복군 참모장/ 제 2지대장, 1915년에 몽양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1920년 3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수천 리를 도보로 강행군하여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가서 연성대장(硏成隊長)이 되어 활약하였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킨 뒤, 그 다음날부터 23일까지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전지(戰地)를 옮기면서 일군의 주력부대를 강타하여 일본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다. 광복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42년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불의에 타계한 후 각지대 개편에 따라 제 2지대장에 임명되었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38|백파 김학규]] 광복군 제 3지대장, 현익철(玄益哲)·양세봉(梁世奉)등과 같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한중합작 항일투쟁을 협의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동부대로 개편하여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1932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는데 조선혁명군 3개중대는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으로 신빈현(新賓縣) 남쪽에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영릉가(永陵街)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소극적인 자세와 일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삼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33년 12월 그는 이청천·황학수·오광선·박명진 등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 겸 참모장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 제3지대장 겸 징모제6분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1942년 2월 임지인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일본군 점령 치하에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하고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였으며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외에도 중국 유격대와 같이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한 3지대 기간요원들의 활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45년 5월부터는 광복군 제2·3지대에 대한 한미합작 특수훈련(OSS훈련)이 계획되었다. 제3지대는 지대장인 그의 책임 하에 미국인장교 윔스(Chrence B.Weems)가 교육을 담당하도록 계획되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무산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569|나월환]] 광복군 제 5지대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되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함께 광복군의 주축이 된다.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90|김문호]] 1933년 4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37년 3월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독일 기선을 타고 일본 장기(長崎)를 탈출하여 절강성 영파(浙江省 寧波)로 망명하였다. 1937년 8월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영파 방수사령부(防守司令部) 정치부에 특채되어 1939년 12월 소교(少校)로 진급하고 3전구 방송국에서 반전방송을 하였으며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 문서 및 서적 등에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중앙군관학교 제3분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함에 중경에 복귀하였다. 다음 해 3월 1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광복군 제3징모처(第三徵募處) 임명식이 거행되어 그는 주임위원 겸 선전 조장에 임명되어 강서성 상요로 파견된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염전사상고취 전단, 일본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에 싣고 야전 방송기재를 휴대하고 금화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을 살포하고 일선방송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선전물을 갖고 절강성 천태현(天台縣)으로 나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제1유격 정진군종대(挺進軍縱隊) 사령부와 합작하여 일선공작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다.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상교와 초모공작에 있어서 경쟁 관계에 있었고 1944년부터 그의 제 3 분대는 건양(建陽)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선전 및 초모공작과 한미(韓美) 합작의 작전을 지원하였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3|화암 정현섭]] 광복군 전시공작대 대장/ 상하이 지하공작 활동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1940년부터는 전시공작대를 조직하여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099|유기석]] 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대장 / 제 3징모분처(2지대 3구대 3분대) 부대장 1928년 3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在中國朝鮮人無政府主義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며, 1930년 봄 동지(同地)에서 연구단체 조선무정부주의간담회(朝鮮無政府主義懇談會)를 조직하였고 대한대독립당주비회(大韓大獨立黨籌備會) 기관지『한국(韓國)의 혈(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동년(同年) 4월 상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1931년 무정부주의자 연구단체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 이후에는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등 각종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천진(天津) 일본총영사관 파괴 및 주중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처단 등을 시도하였다. 1933년 7월 반일만(反日滿)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중호조연합회(中韓互助聯合會)를 결성하였고 1935년 상해한인청년연맹원(上海韓人靑年聯盟員) 엄순봉 등과 함께 친일 행위를 자행하던 상해조선인민회 간부와 옥관빈 등의 처단에 관계하였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검거를 면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제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상해의 영미(英美) 각 기관과 신문사 등에 대한 폭탄투척과 일본 군함 이즈모(出雲丸)호 폭침(爆枕)을 시도하였고 1943~1945년 남경(南京)에서 한족동맹(韓族同盟)의 의장이자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부대장으로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