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중화민국 군대의 상황(1937~1945) === [[국민혁명군]]의 복식과 동일하였다.[* 심지어 백일청천 뱃지가 달린 군모를 쓰고 촬영된 증명사진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파일:이렇게 좋은 옷은 없었다.jpg ]] >'''"이렇게 좋은 옷은 그 당시 없었단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군복을 생산할 물자를 조달하고 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군복 관련 규정이 제정된 후, 군복 제작 경비가 군비(軍費)[* 이 당시 광목, 비단, 모직 등의 원단은 현물자산으로 현금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의 형식으로 각 지구(地區)에 할당되었고, 지역 책임자는 피복 공장에 제작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이 경비가 중간에서 착복되기도 했고, 공장마다 제작 수준이 달라 군복의 완성도에도 차이가 생긴 것이다. 현지 염색 공장에서 원단을 염색하였기에 그 색이 규정된초록색에 근접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정민, 한국광복군 군복과 군용장구 연구, 28p (2018)]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산업시설이 있는 대도시와 철로를 점령하였던 여건 상 피복 공장마다 완성되는 군복의 품질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군복이 광복군에게 지급되기는 어려웠다. [[파일:v2-687e287bec9a4f004dc8c5b1d1c414f4_1440w.jpg ]] 위 사진처런 대부분의 경우 [[광목]][* 목화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짠 후 삶는 작업을 반복하여 당시 베틀을 사용해서 만들어서 현재 만들어진 광목에 비하여 상당히 거칠었을 것이다. 자연가공한 원단이기 때문에 물세탁시 5~10%내외 수축률이 있는 원단이다. 중국대륙은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가급적 안빨고 다녔을 것이다.]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군복[* 한국전쟁 시기 국군 전투복도 경성방직, 조선방직에서 군복을 대량 제작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전투복이 구하기 어려운 것은 내구성이 약하기 때문이다.]을 착용하였는데, 추운 겨울철에도 3~4백명의 군인들이 얇은 옷으로 버텨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24집, 광복군복 연구 (152p~153p)] 이마저도 군복 염색물이 빠지는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파일:1-000788-030-0000.jpg ]] 국민혁명군에게 받은 군복 색깔도 옅은 황토색, 황토색, 청색, 진청색, 하얀색[* 염색재료도 없으면 하얀색 그대로 입고 다니는 것이다.], 검은색 등등 다 달랐었고 모직이냐 면이냐 광목이냐 따라서 재질도 많이 달랐다. 같은 색이어도 나염기술[* 천연 쪽염색, 먹염색을 사용하거나 혼용하는 식으로 색을 냈을 것이다.]이 좋지 않아 군복의 색상 역시 앞의 이유 때문에 짙고 옅은 정도가 제각각이었다. 상하이[* 당시 상하이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국제도시이자 항구였다.]나 난징[* 중화민국 수도였고 현재 베이징은 베이핑이라고 불렀다.] 정도 되는 대도시에 가야 미싱 500기를 돌려가면서 공장처럼 군복을 찍어낼 수 있지. 이마저도 1937년에 중국의 도시들 절반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군복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부대표식이나 계급장은 생략되는 경우도 많았다. 출신마다 중국군관학교 출신, 중국내 한인교민, 일본군 한적사병 출신 등등 많았지만 다양한 중국 군벌내에서도 옷이 다 다르니 그 옷들이 다 같을리는 없었다. [[파일:1940 중국.png]] 충칭(광복군 총사령부와 1지대)과 쿤밍(OSS 중국전구 본부)[* 장제스가 김구와 약산 김원봉을 좋아했기 때문에 당시 양복점에서 맞춤으로 모직으로 된 군복들이 있었고 장제스와 친하지 않은 군벌이거나 소수민족 공작대에겐 가혹하게 차별했다고 한다.] 일부분 제외하고는 광저우와 홍콩등 해안에 있던 대도시들이 전부 일본군에게 점령되는 바람에 양질의 좋은 전투복을 구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무기대여법으로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총기를 해상로로 보내고 싶어도 못보내고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야 국공내전때 미군무기가 중국대륙에서 많이 나오지 그 이전엔 상선도 못들어갔다.] 해로가 다 차단된 상황에서 후난성 챵샤대회전처럼 철도 길목 요충지를 막아내려고 필사적으로 전투했었다.[* 창샤가 뚫리면 구이저우성과 쓰촨성 충칭으로 가는 곳을 열어주는 것이니 필사적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폭격기 공습으로 대도시도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양복옷감을 구하기는 더 힘들었고 설령 옷감이 있다하더라도 양복을 맞춤으로 입었던 시절이라서 양복만드는 테일러들이 일하는 곳이 대도시들이었다. 가죽 군화도 전부 맞춤 수제화였고 1990년대까진 양복과 구두는 전부 맞춤으로 입고 다녔다. 1990년도 이후, 현재 우리가 군대에서 대량으로 군복이나 전투화 받는 경우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다시피해서 나오는거지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엔 하나하나 다 맞춰 입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