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문단 편집) == 몰락과 근황 == 한총련이 [[전대협]]의 조직력을 물려받았고, 이를 토대로 초기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대명사로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현재의 한총련은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존립 기반이 흔들리던 한총련은 다음해인 1997년 5기 집행부 출범식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진압하던 전경 1명을 숨지게 한 데 이어, 지나가던 선반공을 프락치로 오인하고 집단 폭행해서 살해한 [[이석 치사 사건]] 등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10800209139010&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1-08&officeId=00020&pageNo=39&printNo=23703&publishType=00010|#]][[https://brunch.co.kr/@1980may18/4|#]] 연속해서 사고를 치며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에 검찰과 경찰은 합동으로 '한총련 와해 전담반'을 구성하여 한총련 소속 학생들에 무더기 수배 영장을 내리고 한총련 소속 학생회장들에게 자진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후 기수를 거듭할 때마다 번번이 이적단체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북한에서는 한총련에게 활동이 어려워진 기존 한총련 조직을 버리고 새 조직을 만들어 활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북한의 요구를 한총련이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조언 혹은 지시를 한총련은 듣지 않고 조직을 유지한 채 제법 한참 동안 활동한다. 당시 한총련을 감시하던 보안부서에서는 한총련이 북한의 조언을 무시하자 상당히 놀라워했고 언제까지 한총련이 버틸지 궁금해했다. PD 계열 대의원들은 1999년에 한총련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 전국학생연대회의(2005년 [[전국학생행진]]으로 개칭)을 구성했다. 전학협은 2004년 해소하여 현재 [[사회당(1998년)|사회당]] 학생위원회나 대학생사람연대 등 서클 중심의 단체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학사정연), [[노동자연대|다함께]] 등등 다양한 집단으로 떨어져 나왔고, 비운동권이 당선된 학교는 곧바로 한총련 탈퇴 루트를 타는 현상이 발생했다. 여기에 민주화 이후 탈정치화된 대학생 및 젊은이들의 입장과 더불어 경제 호황기 시절이었던 전성기 때와는 달리 크게 말라버렸다는 혹평을 받았다. 또 과거 제5공화국 시기와는 다른 성향의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한총련의 지위도 말라들었다는 것. 게다가 1997년 문민정부 말기에 일어난 '''외환위기'''와 실업난과 경제난으로 대학생들의 미래까지 암담해지게 되면서 이 때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매우 낮아지게 되었던 계기까지 맞게 된 것도 원인이었다.[* 제5공화국 시절에 활동했던 60년대생과는 달리 1997년 당시 대학생으로 있었던 70년대생의 대학생들부터 경제위기와 실업난이라는 중고(重苦)에 접하게 되면서 이 때부터 점차 대학생들의 정치 및 사회운동 참여가 저조해졌다는 일설도 있다. 이 당시 대학생들은 IMF 구제금융 위기와 기업들의 구조조정이라는 악재까지 겹쳐서 직업 진로나 미래에 대한 암담함과 우울함이 다른 때의 대학생들과 매우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그 당시 존재했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망하게 된 것도 원인이 된 것.] 그래도 한총련이란 조직은 2000년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조직력도 상당했다. 2003년 3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41517|한총련 합법화에 대한 의지를 밝히면서]] [[전교조]]나 [[민주노총]]처럼 당당히 합법 재야 단체로 도약하나 싶더니만, 그 해 '''[[5.18 민주화운동]] 23주년 기념식장에서 과격 시위 사건'''이 터지자[* 사실 과격 시위를 한 이유가 한총련 측이 [[http://news.donga.com/amp/all/20030518/7944998/1|5일 전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굴욕 외교'라고 간주한 것 때문이었다.]]] 결국 합법화는 물 건너갔고, 이후 혁신계열인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학생운동단체 수립"을 내걸었고 이후 정통 계열인 NL 비선과 정통계열에서 개량화된 [[NLPDR]] 혁신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대학 운동권 1번지인 한양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을 탈퇴했다.[* 한양대는 한총련 1기 의장을 배출하기도 했고, 한양대 서울캠퍼스 지형이 고지전에 적합한 지형이라 8~90년대 어지간한 학생운동 행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일단 한양대로 철수해서 버티는게 하나의 전술이었다.] 그 와중에 법무부는 7월 25일에 수배 중인 한총련 학생 152명 중 79명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06720|수배 해제시켰다.]] 결국, 2006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구성되면서[* 단, 한대련이란 조직 자체는 2003년부터 있었다.] NL 혁신을 주축으로 한 대다수의 한총련 가입 학교는 한총련을 탈퇴하고 한대련으로 활동 범위를 옮겼고, 정치적 한계로 소수화된 NL 비선 중에서도 선두급이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조차 한총련을 탈퇴하고 한대련으로 이적(?)하였다. 한총련이 [[이적단체]]여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어려웠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요새도 이적단체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듯.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num=36193|참고]] 게다가 2008년 한총련 16기 의장 선거에 단 한 명의 후보자도 나오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거기에 예정되었던 16기 출범식 역시 촛불 집회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지금은 극히 소수의 학교(혹은 단과대학 학생회)만이 한총련에 남아 있었으나 2017년 기준으로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 공대나 자연계는 확고한 한총련 지지파이나, 03-04학번 이후로 자연대에서 운동권은 '''소멸'''했다. 이유는 04학번이 단대 학생회장을 맡을 때 자연대 학생들의 의견수렴을 하지 않고 멋대로 성명서를 발표해 자학대회[* 자연대 학생 대표자 회의를 부르는 말, 대개 단과대 학생 대표자 회의는 그 단과대학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지는데, 자연대라서 자학대회. 물론 여기에는 자조의 뜻이 담겨있다.]에서 탄핵 발의 되는 사건이 있었고 [* 당시 연서를 받아 탄핵 발의만 되었고 실제 탄핵을 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인 대의원의 3분의 2가 모이지 않아 탄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 뒤로 09년도에 단대 학생회가 들어설 때까진 자연대는 학생회가 없었다. 공대쪽 역시 큰 영향력은 지니고 있지 않은 듯. 그래도 몇 년 동안이나 단과대 학생회를 차지하는 걸 보면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참고로 서울대 총학생회는 전통적으로 [[민중민주주의|PD]] 계열이 강세였다. 서울대는 한창 한총련이 흥하던 90년대 중반에도 한총련은 물론 [[NL(정파)|NL]] 계열이 한 번도 수권하지 못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즉, 서울대 총학생회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한총련에 속하지 않았으며 주요 대학 가운데 한총련 계열이 가장 힘을 쓰지 못하는 학교였다. --그래서 샌님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 어쨌거나 [[한대련]]이 사실상 한총련의 위치를 이어 받았다고 할수있다. 한대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진 않았으나, 아직도 [[이적단체]]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에 [[국가정보원]]이나 [[대한민국 경찰청|경찰]], [[대한민국 검찰청|검찰]] 공안부 등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8월 26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측은 폐쇄 조치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조치가 적법하다고 판결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914599|참고]] 진보네트워크 측은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 제2부는 이를 기각하였다. 한편, 진보넷 측은 폐쇄 조치의 법적 근거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하였으나 이 역시도 2015년 10월 21일에 합헌 결정이 났다. 결국, 한총련의 홈페이지의 복구는 요원하게 된 것이다. 2017년 9월 한총련 전직 간부들이 이적단체 규정 20년만에 광주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한총련 전직간부 80명은 16일 광산구청에서 모임을 갖고 90년대 한총련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공과를 평가하고 향후 역할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들은 생활현장에서 공동체, 나눔, 정의 등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9550887|기사]] (다만 이 모임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산구청장 선거를 준비하던 강위원 전 한총련 의장이 주도한 모임으로 사실상 선거 기획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