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방송공사/역사 (문단 편집) === 광복 후 ===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archive/VodViewer.jsp?fileName=vod/collection/KOREAOFRECORD2014/CEN0002064/000000000001/000000000001/CEN0002064_000000000001_000000000001_0001.wmv&CurPosition=&EndPos=&eid=0051144941&isCaption=Y&isSubtitle=N&subtitle=|'자유의소리' 라디오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송되기까지의 과정(1957)(국가기록원, 플러그인 설치 필요)]] [[1945년]]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일본의 'JO'와 식민지 조선의 'JB'대신 고유의 [[호출부호]] 'HL'을 받아 HLKA라는 약어를 사용하였다.[* 방송의 날이 매년 9월 3일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KBS 창립 전까지는 라디오에서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KBS 1TV]](CH 9)와 [[KBS 제1라디오|1라디오]](서울 97.3MHz) 계열의 콜사인은 '''HLKA'''이다.[* 현재도 KBS 제1채널에 부여된 호출부호는 각각 제1라디오 소래송신소 HLKA, 1FM은 HLKA-FM, 관악송신소에서 송출하는 표준FM은 HLKA-SFM, 1TV는 HLKA-DTV(아날로그 시절에는 HLKA-TV)이다. 이는 NHK도 마찬가지어서 NHK 도쿄 요요기 방송센터는 전부 일본 최초의 호출부호인 JOAK로 묶여있다.][* 다만 1997년 이전까지는 그렇게까지 빡빡하지 않았는지 1라디오 AM(표준방송)은 HLKA, 1라디오 표준FM과 1TV는 [[http://www.kea.kr/elechistory/access/ecatalogt.php?callmode=&catimage=&eclang=ko&um=t&Dir=552&start=554|HLCK]], 1FM은 HLQK를 사용했다. 최소 1997년 중반부터 전부 표준방송 호출부호를 기준으로 묶인 것으로 추정.]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과 함께 공보처 방송국 산하로 편입되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구 JODK 건물 외에 8개 지국이 파괴되었고, 서울중앙방송국은 천도한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이동하면서 HLKI 대전방송국이 18일동안 [[https://blog.naver.com/korcadtv/222299402866|대전중앙방송국]]으로 중앙방송국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7월 15일 중앙방송국도 대전을 떠나 [[https://blog.daum.net/jc21th/17780104|대구로 이동]]하였고 낙동강 방어선도 위태해짐에 따라 8월 중순 중앙방송국은 [[https://blog.daum.net/jc21th/17780870|부산으로 피난]]갔다.[* 전쟁 시 가장 먼저 접수되는 곳 중 하나가 방송시설이었음을 생각하면 파괴 또는 소실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전쟁 초기 서울 철수 당시 피난가면서 연희송신소를 파괴하지 않는 실수가 일어나 북한군이 몇 주 동안 프로파간다 방송에 써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KBS는 전쟁 초기 대전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미국의 소리]] 방송을 전국에 중계하기도 했으며 유엔군 당국과의 협조 하에 VOA나 유엔군의 소리(VUNF) 방송, 일본 NHK를 통한 한국어 특별방송이나 및 해상이동방송을 실시해 심리전 활동을 했다. 휴전 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한 이후에는 구 조선방송협회 사무국을 활용하여 방송했지만, 지나치게 시설이 좁아 동화백화점 강당 등을 빌려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1956년 서울 남산 자락에 '남산연주소'를 세우고 1976년까지 이 곳에서 방송을 제작/송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자리가 원래 [[조선총독부]] 중앙청이 세워지기 전 일제 [[통감부]]가 있던 자리였다는 것.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BS%EC%A4%91%EC%95%99%EB%B0%A9%EC%86%A1%EA%B5%AD_%EC%A0%84%EA%B2%BD_(1972).jpg|1972년 KBS중앙방송국 전경]] 참고로 옛 남산 사옥은 1976년부터 [[국토통일원]] 청사로 쓰이다가 1986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로 주인이 바뀌었고, 1995년 안기부 측의 내곡동 이전으로 서울시에 귀속되어 1999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이용되었다가 2018년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었으며, 라디오방송국 청사 반대편에 1961년 세워진 TV 방송용 건물은 [[영화진흥위원회|영화진흥공사]] 건물로 쓰이다가 케이블채널 리빙TV 사옥으로 각각 쓰이고 있다. 그런데 [[라디오]]와 달리 [[텔레비전]] 방송은 엄밀히 말해 KBS가 국내 최초는 아니다. 1956년 미국 TV수상기 메이커인 [[RCA]]가 출자한 '[[HLKZ-TV]]'(KORCAD-TV)가 시초이며, 당시로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던 RCA의 영상장비와 미국인 엔지니어까지 갖추어 기술적으로는 일본 못지않은 시스템을 짜놓았다. 그러나 경영난[* 당시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경제 상황이 위낙 개판이었던데다가 송출지역도 좁고 [[TV]] 가격도 비싸 방송 광고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려웠으니, 당연히 흑자를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당시에 한국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았던 [[프랑스]]나 [[일본]], [[소련]]에서도 아직 TV가 일반화되기 이전이었으니 한국에 TV가 보급되는 것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당시 HLKZ 회장을 맡았던 황태영은 직원 인건비라도 보태볼려고 노력을 했었지만 '''얄짤없이'''(당연히 국내에서 TV를 생산하던 시절이 아니라 당시 TV는 죄다 외제품이었다.) 고액의 소비세가 붙는 바람에 안 그래도 비싼 TV가격이 더 비싸져서 고위급 공무원이나 재벌급 부자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으로 인해 1957년 [[한국일보]] [[장기영(1916)|장기영]] 사장이 경영권을 인수했고, 이름도 DBC 대한방송으로 바꾼다. 한국 언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 그는 생전에 자기 자신을 항상 '장 기자'라고 불렀다.]은 TV시대의 개막을 염두에 두고 사업확장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DBC는 1959년 방송국 아래층에 있던 가구점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버려 방송을 중단하고 말았다.[* 전기누전보다는 난방상 실화로 추정.] 이후로는 [[AFKN|AFKN-TV]]에서 매일 19시 30분부터 20시까지 30분간 한국어 방송을 하여 TV 방송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 방송은 KBS TV가 개국할 즈음인 1961년 10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일보]] 측에서 놀고 있던 방송인력과 남은 장비는 당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가 인수받았다. 그리고 공보처가 있던 남산에 개국한 것이 현재의 KBS 1TV(당시에는 KBS TV)인 것이다. 1960년에 소관업무가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 1961년에 공보부로 각각 이관되었고, 그해 7월에 대공방송을 담당하는 '서울국제방송국'을 개국하였다. 원래는 국영TV방송국의 개국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갑자기 계획이 급하게 당겨졌다는 증언이 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108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1-08&officeId=00032&pageNo=4&printNo=4887&publishType=00020|1961년 11월 8일 경향신문 보도]] 참조. 또한 당시를 회상하는 여러 방송 관계자들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일종의 '국민에 대한 선물'로 TV 개국을 서두른 감이 없지 않다." 라고 회고한다. 원래대로라면 익년인 1962년 4~6월에나 송출이 가능했을 텐데 무리하게 일정을 당긴 것. 이 때문에 첫 방송 전파는 1961년 12월 31일 19시 30분에 겨우 쏘아올렸으며, 심지어 개국 당시 스튜디오 벽의 칠이 채 마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RCA 시절 한 번도 고장나지 않았던 TV 방송장비들이 KBS-TV 개국 초기에는 고장이 잦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기술상 백색 광원이나 화면을 잡으면 카메라 튜브가 빨리 타 버리는데 기존 KORCAD-TV 인력들이 공무원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으며 이런 것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 한국 초창기 방송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최창봉 전 [[MBC]] 사장의 회고록 '방송과 나'에서 KBS 개국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실제로 국영TV방송국의 인원을 모으는 과정에서 방송 관계자들을 반강제적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후 KBS-TV는 개국 이래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식>, <혁명의 아침>등 국정홍보성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군사정권의 선봉대 노릇을 했고, 1962년 1월 25일에 KBS-TV는 1기 탤런트를 공채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오락매체로서의 TV의 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형식에 있어서는 제작인력의 대다수가 HLKZ 출신이다보니까 HLKZ 시절을 답습했다고 하며, 의외로 코미디 형식의 프로그램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국영방송사이다보니 소재가 교양적이거나 정권 계몽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썼다. 당시에는 TV 수상기가 1만 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군사정부에서는 1962년 2월부터 2만 대의 TV를 미국과 일본에서 긴급 도입해 월부로 판매하였다. 당시 이렇게 수입된 TV 수상기를 가지기 위한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했다고 한다. 얼마나 치열했냐면 당시 세종로와 정동 방송국 부근에 엄청난 시민들이 몰려왔고, 그 때문에 교통순경까지 출동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개국 직후엔 세금으로 운영했지만, 당시 전국적인 가뭄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1차 산업의 비중이 높았다.] 1963년 1월부터 시청료(수신료) 징수를 시작하고, 동시에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물론 당연히 반응이 좋을 리[* 거기에 당시로서는 시청료가 엄청 비싼 것도 한몫 했다. (월 100원)]가 없어서 반발이 극심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시청료 수입을 거두고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광고를 붙여 편성하는 방식으로 광고 수입도 거두면서 재정은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이듬해 말에 1964년에 [[동양방송|TBC]]가 개국하며 복병이 찾아왔다. 오락성을 추구했던 TBC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책 홍보에 중시했던 KBS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TBC가 공격적인 확장전략을 짜면서 KBS 인력 상당수를 스카우트해갔으며 TBC에서 신선한 프로그램을 많이 내놓으면서 KBS가 광고방송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한 공격이 늘어났다. 물론 아직은 TV가 사치품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정도는 덜했지만 어쨌거나 KBS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져 나갔던 것은 어쩔 수 없었고, 이에 KBS는 TV 댓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 폐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TV 댓수가 계속 증가해서 시청료 수입이 급증해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해야할 명분이 사라지자, 1969년 5월 1일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폐지하고 동시에 오전 아침시간대를 이용해 교육방송을 시작한다. (단, 특집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은 1972년까지 광고를 계속했다.) 여담으로 라디오 단막극인 '[[KBS 무대]]'는 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60년 넘게''' 방송 중인 프로그램이다. 1968년 7월 25일부로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개편되면서 서울중앙방송국, 서울텔레비전방송국, 서울국제방송국 3개 국이 통합하여 '중앙방송국'으로 개편되었다. 1969년부터 일일연속극 <신부 1년생>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각 방송사별로 일일연속극 편성을 두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KBS가 광고를 더 이상 안 하게 되었다지만 시청률이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윗선의 눈치를 보면서도 시청률 경쟁을 이해 일일연속극을 편성했던 것이었다. 1972년 서울 불광동에 국내 최초로 TV 무인중계소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2072400209208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7-24&officeId=00020&pageNo=8&printNo=15632&publishType=00020|개설했다.]] 공사화 이전에는 문화공보부 산하 기관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임직원들은 [[국가공무원]]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KBS 간부로 입사ㆍ전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정순일(1934~2009, 전 본사 보도본부장), 손영호(전 본사 부사장), 신정휴(전 MBC 전무이사)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