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방송공사/역사 (문단 편집) === 시청료 거부운동[* 1989년 이후 현행법상 명칭은 '수신료'이나, 당대 문헌에서 '시청료'란 표기를 많이 썼다.] === * 관련 자료 *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20|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자료]] *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0408011836461#c2b|경향신문 <실록 민주화운동> 66회]] * [[https://klmemory.osasf.net/items/show/193|김세진이재호기억저장소 자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이렇게 고액의 시청료(현 수신료)[* 지금이야 2500원이 [[짜장면]] 한 그릇값에도 못미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대에 불과했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당시 기준으로 3~4만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를 걷고도 친정부/친자본 편파보도에 만화영화는 거의 외제로 채우고,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무시한 채 허구적 성공사례만 내보내며 반민중적 방송을 했고, 상업광고도 "돌려 먹을래"나 "빨아 먹을래" 같은 선정적 멘트까지 여과 없이 내보냈다. 이런 와중에 1982년 [[전라북도]] [[완주군]] 등 [[농촌]] 지역에서 시청료 납부거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도 시청료 납부를 안하던 가정수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다. (수신료를 아낄려고 TV 없는 척하는 가정이 꽤나 많았다고.) 하지만 "사회운동"으로 본격적으로 조직화 되었던건 이 시기.] 이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난시청]] 문제와 편파보도 문제로 불만이 커져 시청료 미납가구가 점차 증가했다. 그러다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2.12 총선]]을 앞두고 KBS와 MBC에서 아예 대놓고 '''편파 드라마'''[* KBS와 권력(강동순 저) 참조.]를 방영 하면서 시청료 거부운동에 불을 질렀다. 이 선거 편파드라마의 여파로 분노한 시청자들에 의해 시청료 거부운동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되자, 1985년 5월 1일 KBS-1TV의 술, 유흥업광고가 폐지되고, 동시에 저녁 블록광고량을 20%(10건→8건) 감축시켰다. 하지만 당시상황으로 봐서 편파보도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고, 결국 85년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6년 1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주관하에 'KBS TV 시청료 거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으며, 당시 제 1야당이던 [[신한민주당]]도 이에 동참하여 KBS 뉴스 안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시청료 징수율이 급속히 낮아지자 다급해진 정부와 민정당은 1986년 5월 14일 'KBS 운영개선안'을 마련해 1989년부터 1TV 평일 오후 블록광고를 폐지토록 했다만 당연히 미봉책에 불과했고, 이미 1985년 12월 한국방송공사법 개정 시부터 시청료 체납자에 대해 관할 세무서가 강제징수하도록 하던 걸 KBS가 문공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강제징수하는 쪽으로 개정했고, 1986년 11월에는 내무부가 대도시 일부 지역에 전기/수도세까지 통합한 '통합공과금' 제도[* 제도 자체는 1983년에 서울 일부 지역, 경북 경주에서 시범 실시했다.]를 시행해 시청료 거부운동을 막고자 했으며 경찰 역시 운동본부 측의 스티커 배포 가두캠페인을 물리력으로 단속하는가 하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KBS 시청료 거부운동 보도금지를 요청하는 '[[보도지침]]'을 내보냈다. 1986년 9월 6일 범국민운동본부와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사회정의위원회 대표 11명이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483874|성명]]을 냈고, 그 일환으로 동월 29일 범국본, 신민당, 민추협,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KBS 시청료 폐지운동 여성단체연합 등 재야 5개 단체들이 'KBS 시청료 거부 및 언론자유공동대책위원회' 발족을 선언했다. 이 투쟁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여성들의 정치적 결속인데, 범국본에 고발된 내용 대다수가 징수원의 고압적 횡포와 관련된 것이며 이들이 주로 집에 혼자 있는 부녀자를 상대로 폭언, 협박, 공갈을 자행한 면이 포착되었다.([[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840724|당시 항의문]],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835269|사례집]],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840424|진정사항 통보]]) 이를 토대로 여성들은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인식하고 조직/세력화의 의미를 확인하는 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청료 거부 운동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이 운동은 KBS와의 싸움을 넘어 반독재/시민불복종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동년 6월을 전후해 CBS 뉴스 부활투쟁, 나아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증거로 범국본 집계 기준 TV 수상기 보유 가구 중 52%가 이 운동에 가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1988년 시청료 징수액이 790억원으로 당시 최고점을 기록했던 1984년의 1255억원보다 465억원이나 줄어들고 징수율도 '''44.3%'''에 그치는 대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 동안 컬러 TV가 널리 보급되었던걸 생각해보면 폭탄거하게 맞은 셈. 이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1994년 10월 수신료 합산징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수신료 징수율은 50%대에 머물게 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통합[[공과금]]제로 끌여올린 것으로 통합공과금제가 시행되지 않는 지역의 시청료 징수율은 20~30%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다만 [[3저 호황]]과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으로 광고수요가 급속히 늘어 적자는 보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1986년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아시안 게임]] 효과에도 1TV 광고축소로 상당히 손해를 봤지만(광고액수자체는 늘었지만 [[MBC]]에 비하면...) 1987년도에는 서머타임 실시(방송종료 시간이 1시간 늦쳐졌다. 물론 도표상으로만 그렇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방송 시작 시간이 1시간이 앞당겨지고 오전방송도 1시간이 앞당겨진셈이 되었지만)와 10월 토요일 낮방송 실시로 2TV의 광고수입이 증가하고 1988년도에는 [[올림픽]] 특집 프로그램과 중계 프로그램이 대거 편성되면서 2TV는 물론 1TV의 광고수입이 급속히 늘었고, 그 이후에는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시간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사실상 100% 판매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적자를 보지 않을수 있었던 것.] 하지만 KBS 재정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 재원상으로 극도로 상업화된 공영방송이라는 딱지가 붙어졌다. 이 당시 KBS 매출에서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0%대 중후반이었고, 광고가 70%를 넘었다.[* 재미있는건 그럼에도 [[문화방송|옆 방송사]]보다 광고수입이 적었는데, 이는 1TV의 광고량이 적은데다가, 2TV의 광고료가 MBC보다 싼 영향이 컸다.] 어쨌거나 이 시청료 거부운동이 미친 영향은 커서 1987년 [[6월 항쟁]] 발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참고로 6월 항쟁당시 KBS의 편파보도에 분노한 시민에 의해 [[KBS부산]], [[KBS대전]], [[KBS순천]] 등 일부 지역국 건물이 불에 타거나 유리창이 깨지는 등의 피해를 봤다고 한다.], [[6.29 선언]] 이후 KBS 노조 설립, 사회고발 프로그램 신설([[뉴스비전 동서남북]], 논픽션 드라마, 생방송 심야토론, 르포60 등), 보도 프로그램의 공정성 제고 등 방송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87년 11월에는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적용기관에서 제외되고 한국방송공사법이 개정되어 이사회 이사 추천권을 방송위원회가 갖도록 하고, 이를 거쳐 사장을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임명제청하는 쪽으로 바꾸어 1988년 5월부터 새로 이사회를 구성했다. 이러한 방송민주화 운동은 1987년 말에 KBS 경영진과 보도국 간부들이 대선보도를 편파적으로 진행하면서 초기에는 무의미한 결과로 남는듯 싶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국회가 [[여소야대]]가 되고 5공 청산 움직임과 함께 탄력을 받은데다가 [[6.29 선언]] 이후로도 시청료 거부운동이 여전한 세를 발휘하며 시청료 징수율이 40%대로 낮아지는 악재까지 쌓이면서 KBS 경영진의 힘이 약화되어 버렸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정구호]] 사장이 중도 퇴진하고 [[서영훈]] 사장이 부임하면서 실현되는듯 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큰 변수가 생겨버렸다. 다른 한편 경영합리화와 업무 전문화를 추진코자 1989년에는 방송제작사업단(현 한국방송제작단)과 [[KBS비즈니스|방송시설관리사업단]]을 먼저 세운 후, 1991년에는 KBS 아트비전과 [[KBS 영상사업단]]을 각각 세워 기능을 분산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