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불교태고종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결혼]]하여 처자식을 가진 [[승려]], 즉 대처승이 대부분이었다. [[광복]] 이후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왔다. 비구승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승려이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 정화운동'이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의 잔재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참 목적은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었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이 적지 않았고, 자유당이 여기에 눈독을 들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웃]],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본래 광복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와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요지의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실제로, [[2003년]] 세수 92세(법랍 77세)로 사망한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HDm&articleno=12889530&categoryId=650969®dt=20150214174136|서옹]]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광복]] 전후 [[백양사]]에는 15세인 서옹(당시는 동자승)만 비구승이고 다른 승려들은 모두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는 서옹만 법당 안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야단법석|법석]]을 깔고 밖에서 예불을 드렸으며, 더 이상 대처승의 상좌(제자, 후계자 개념)를 들이지 않는 등 철저하게 타협안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 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 vs 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은 일제 말기에 양산된 대처승들을 불교계에서 쫓아내려는 움직임에 [[이승만]] 대통령 등이 지원하고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정부측의 여론몰이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진다.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조계종이 세워질 때 밀려난 대처승들이 만든 종파가 바로 태고종이다.''' 조계종과 태고종 모두 나중에는 정치깡패까지 동원하였다. 심지어 정치깡패를 머리 깎이고 명목상 [[승려]]로 두고 전투원으로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고승들은 조계종이고 태고종이고 할 것 없이 멸시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유명한 고승 [[한국 불교]]의 [[근본주의]]화에는 우호적이었던 [[성철(승려)|성철]] 스님의 경우 나중에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 기존 불교계에 항의하는 의미로 종정 취임식장은커녕 종정 재임기간 내내 머물던 절을 떠나지 않았다는 일은 유명하다.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냈다는 점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형태로 부분 회귀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오늘날의 좌선 수행 및 출가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불교]]의 기본 형태가 다시 조성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향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근본주의]]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