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야구사 (문단 편집) ==== 야구의 상륙 ==== 1904년 [[필립 질레트]]가 YMCA 선교단으로 조선 땅을 밟은후, [[미군]]이 캐치볼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조선인들을 보고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 야구장비를 도입해온 것이 한국의 야구도입의 시초로 보고 있다.[* 동아시아에 [[격구]](擊球), 타구(打球)라고 하여 땅에 놓인 둥근 물체를 긴 장대로 치며 노는 전통 놀이가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말을 타면서 하는 경기 내지는 군사훈련의 일환이었으므로 서양의 [[폴로]]나 [[하키]] 정도와 유사하지 야구와는 도입 초창기에 그 이름을 따 온 것을 빼면 별 관련이 없다.] 필립 질레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하고 야구의 규칙, 기술등을 가르치며 장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과 연습게임을 하면서 규칙을 익혀 나갔고 특히 하령회(夏令會, 여름철 목회자들의 수련 및 휴가 모임)를 맞아 개신교 세가 강했던 평안도 [[평양시|평양]], [[선천군|선천]] 등지에서 올라온 선교사들과 연습경기를 자주 가리며 실력을 키워 나갔다. 기록상 남아있는 최초의 공식 야구 경기는 1906년 3월 15일에 훈련원 공터[* 서울 을지로 종합의료원 왼편. 조선 때부터 군사 훈련을 담당하던 조정 관청인 훈련원이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폐지되면서 이후 이 자리에는 훈련원공원이 들어선다.]에서 [[한성외국어학교|덕어(德語)학교]][* [[독일어]]를 가르치는 학교. [[덕국]](德國)은 지금도 한자 문화권에서 독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간의 경기였다. 이날 경기의 자세한 내용은 남아있지 않으나 YMCA 야구단이 3점차이로 패배를 기록했다는 것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엿새 뒤에도 덕어학교와 리벤지 매치를 가졌으나 2점 차 패배를 당했다. 1906년 4월 7일에 [[한성외국어학교|일어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영어학교]]간의 야구경기가 [[독립문]] 앞에서 야구경기를 가지는 등 야구가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의숙에서 야구부]]를 창단하며 본격적인 사립학교 야구부가 창설되기 시작했다. [[경기고등학교 야구부|관립중학교 야구부]]가 1908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창설 자체는 1905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본격적으로 야구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1908년 가을부터다.] 당시 조선의 야구단들의 경기는 꽤나 열악했는데,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수들이 야구규칙도 숙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공 자체의 탄성도 좋지 않은데다 경기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포지션도 9명이 전문적으로 훈련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내야수 3명에 외야수 2명만을 세워 게임을 가진 것도 있고 값비싼 글러브[* 당시 야구장비는 전량 미국에서 수입해왔는데 미국에서도 비싼 물건이었던 만큼 조선에서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기준으로 야구배트의 가격은 1원 50전으로 쌀 한가마니의 가격인 3원의 절반에 달했고, 글러브의 경우에는 5원 50전으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가 없어 글러브를 낀 사람보다 맨손으로 수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야구 규칙의 중요성 때문에 심판 육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최초에는 질레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심판 역할을 맡고 있다가 대한민국 최초의 심판인 김영제(金永濟)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며 조선인 심판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당시선교사들이 외국인들이다 보니 판정할때 반드시 영어로 해야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제1회 [[전국체전|전조선야구대회]]의 대회요강에도 명기되었다. 또한 스트라이크, 볼, 아웃 이외에도 니어(near), 로우(low), 하이(high)등의 형용사를 덧 붙였다. 예를들어 낮은 볼이면 로우 볼(low ball), 스트라이크에 가까우면서 스트라이크가 아닌 공을 니어 스트라이크(near strike)라고 불렀다.] [[황성 YMCA 야구단]]의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야구발전에 활약하기도 했고 허성, 현동순, 현홍운 등이 선수생활을 그만 둔 후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사건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로 [[YMCA 야구단]]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