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야구사 (문단 편집) ==== 동경유학생 야구단 ==== 최초의 야구팀들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야구를 펼칠 무렵 조선야구 발전에 큰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야구단의 방한이었다. 일본은 이미 1873년[* 참고로 메이저리그가 1876년에 창설되었다.]에 야구가 도입되었고 조선과는 야구경력이 30년 이상 차이나던 시기였다. 이런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야구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박석윤([[도쿄대학|동경제대]]), 서상국([[와세다대학|와세다대]]) 등은 각학교 에이스로 활약하며 출중한 야구실력을 선보였는데 대한흥학회의 주도로 1909년에 조직된 모국방문단중 일원으로 합류했다.[* 1909년~1937년까지 10여차례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행사. 모국방문단은 일본에 비해 떨어져있는 교육수준등을 가진 민족을 계몽하고자 학술발표회, 농촌계몽활동, 학예활동, 체육활동등을 전개했다. 그중 하나가 동경유학생 야구단인것.]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당시 조선에서 적수가 없던 [[황성 YMCA 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9: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고 [[평양시]], [[선천시]]등을 돌아다니며 선교사들과 대결하거나 자체청백전을 펼치며 야구보급에 앞장섰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의 활약으로 고급장비와 유니폼등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압도적인 야구수준에 충격을 받은 [[황성 YMCA 야구단]]이 기량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1913년 11월에 한국 스포츠사 최초로 일본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이름과는 달리 이 야구단은 '동경'([[도쿄]])의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일본각지의 대학에 재학중인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하면 동경이었고 그래서 동경유학생이라고 쳐서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