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원자력의학원 (문단 편집) === 한국원자력의학원 초기 기관장 소개 === '''윤일선(1896~1987)''' '''-제5대 원자력원장(1963.12.17~1967.4.12)''' 윤일선 박사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근대 의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대학자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병리학을 공부했다.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를 거쳐 1929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수로 부임했다.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의 기틀을 정립하는데 힘썼다. 연구풍토 조성을 위해 중앙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고 교실마다 연구실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당시 병리학교실은 3년간 총 9천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윤일선은 후학양성에 힘쓰는 한편 1930년에 한국인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와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 『조선의보』 창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 암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일선은 1934년에 암 예방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에 나서는 등 매우 이른 시기부터 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관심은 1937년 유럽·미국·아시아 국가의 의과대학과 연구소를 시찰하는 병리학 순례로 이어졌고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윤일선은 세계 최초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 연구실을 방문했다. 중성자 가속 장치 사이클로트론이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렌스 연구실을 방문한지 근 50년이 지나 1986년, 당시 원자력병원장인 된 윤일선의 차남 윤택구가 스웨덴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국내 최초 도입하며 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윤일선은 1943년 토끼의 위에 암종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일본 병리학회에 발표했고, 해방 후에는 암 연구를 본격화했다. 1947~1949년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열린 국제암연구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인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 조사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 1955년에 발행된 종합시사교양지 『새벽』에 「암과 원자력」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원자력을 이용한 암 치료 분야의 국내 최초 기고였다. 1958년 윤일선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대한암학회의 모체인 대한암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아 국내 암 연구의 체계화와 보편화에 힘썼다. 윤일선은 정년퇴임 후 한국원자력의학원 창립기념일인 1963년 12월 17일, 제5대 원자력원 원장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암 전문병원의 실제적인 기관장을 맡았고 이후 1964년과 196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IAEA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원자력의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힘썼다. '''안치열(1922~2000)'''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1963.12.19~1969.2.14)''' '''-제2대 원자력청장(1968.9.10~1970.2.17)'''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한 안치열 박사는 국내 방사선의학의 대부로 걸음마 단계에 있던 국내 방사선의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치열은 1944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조교를 거쳐 제1육군병원 방사선과장, 미국 레다만 육군병원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56년 서울적십자병원 초대 방사선과장을 거쳐 195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초대 방사선과 주임교수로 재직했으며, 1963년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학 연구실장을 거쳐 같은 해 12월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기관장으로 취임했다.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국내 최초로 방사선 치료기인 코발트-60 원격치료기를 도입해 국내 방사선 치료의 서막을 열었으며 갑상선 간질환 검진을 비롯해 외암 조기진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암 병원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안치열은 1971년 초대 경희의료원장, 1986년 대한방사선방어학회 회장, 1986~1991년 아시아 대양주 방사선의학회 학술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 방사선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자리에서 도전과 개척을 이어가던 안치열은 퇴임 후 여생을 의료봉사에 바친다. 음성 꽃동네로 내려가 인곡자애병원을 세우고 평생 수집한 의료서적과 집기를 꽃동네에 기증했다. 5년 동안 인술을 베푼 뒤 1995년에는 가평 꽃동네 노체자애병원 의무원장으로 부임해 나환자들과 함께했다. '''이장규(1926~1985)'''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2대 소장(1969.2.15~1973.2.17)'''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2대 원장(1974.2.23~1980.8.24)''' 이장규 박사는 국내 방사선의학 태동기에 연구소장과 병원장을 두루 역임하며 오늘날 원자력병원이 암 전문 종합병원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5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교실에서 핵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 내과 교수를 역임했다. 1969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한 후 암 발생 현황과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 및 예방에 관한 새로운 방안을 폭넓게 모색했다. 그 연구결과는 우리나라 암 치료의 주요 기반이 됐다. 1974~1980년까지 제2대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장으로 재직하면서 99m Tc-generator 최초 도입과 신형 코발트-60 치료기 신규 도입 등 암 치료에 방사선치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리나라 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국내 혈액학 진단과 연구의 개척자로 1976년 대한암협회 이사장과 대한핵의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편 이장규는 ‘의사 중에서 매우 뛰어난 글솜씨를 가진 문학적인 의사’로도 유명해 수필집을 남겼으며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진용(1928~1998)'''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1973.2.18~1974.2.22)''' 1973년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에 부임한 김진용 박사는 재직기간 동안 암 전문기관으로서 원자력병원의 기능과 조직을 확대하고, 진료 기능을 크게 향상시켜 국내 유일 암 병원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김진용은 서울대학교 방사선과를 전공하고 1967년 방사선의학연구소에 부임해 방사선치료 업무를 담당했다. 항상 출근시간보다 40분 일찍 병원에 나와 하루 200여 명에 이른 환자들을 돌본 것으로 유명하다. 병원장이 된 후에는 특수법인체로 전환하여 자체수입 운영방식을 채택했으며 진료 기능을 크게 향상시킨 결과 당시 내원환자가 매년 30% 증가했다. 김진용은 대한방사선방어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 방사선의학 분야를 개척하는데 힘썼고, 1983년에는 ‘한국에서의 암의 역학적 연구’라는 국책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사업은 1963년 방사선의학연구소 창립 당시부터 1982년까지 원자력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약 3만 명의 암환자를 남녀별, 연령별, 지역별, 생활수준별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으로, 이후 우리나라 암환자 치료의 중요한 지표가 됐다. 김진용이 1967년 방사선치료과 책임의사로 부임한 이후 15년간 진료한 환자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원자력병원에서 방사선치료에 헌신했던 그의 삶은 혁신적 암 치료를 선도한 한국원자력의학원의 표상이었다. '''윤택구(1932~2015)'''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제3대 원장(1980.8.25.~1987.12.31)'''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1988.1.1.~1989.12.31)''' 윤택구 박사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 학자이자 암 연구와 원자력의학의 개척자인 윤일선의 차남으로 부친과 같은 병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 교실에서 수학한 후 수도육군병원 병리시험과 과정을 거쳐 1964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병리학연구실에 실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80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병원 제3대 원장, 1988년 한국에너지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에 취임했고 1989년까지 의학원의 제5대 기관장으로서 원자력병원 경영안정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윤택구는 취임 이듬해인 1981년 신축병원 공사 과정을 진두지휘했는데 공학적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건설 본부장을 자청하였고 문짝 하나에서 문고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설계하며 병원 현대화에 적극 앞장섰다. 1984년 500병상, 8개 연구실을 갖춘 신축병원의 모든 시설과 연구능력은 어느 대학, 병원에 못지않은 수준에 이르게 됐다. 아울러 1982년 종합병원 지정, 1984년 한국 최초의 ‘사이클로트론’ 도입과 전담부서 신설 등을 통해 많은 국민에게 암 치료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병원장으로서 뛰어난 행정력을 펼친 것 못지않게 학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연구에도 전념했다. 특히 고려인삼 및 홍삼의 암 예방 효능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1980년대 인삼이 암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상을 받았으며, 1995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의약학부 종신회원이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