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한국인 (문단 편집) === 평화주의 민족론(?) ===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尹承勳)이 치계하였다. > >호적(胡賊)을 분탕한 과정을 군관 이희길(李希吉) 등이 싸움터에서 돌아왔기에 신이 상세하게 물어보고 또 들은 것을 참고하니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중략) >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600년 5월 8일 기사中 >만일 조선 사람들이 꿈을 깨어 가지고 물을 주여 먹어 가면서도 진보 하여 공평 하고 정직 하고 편리 하고 부국 강병하는 학문과 풍속을 힘 쓰거드면 조선 사람도 [[대영제국|잉글랜드]]나 [[미국]] 사람만 못 하지 안 할 터이요 '''조선도 청국을 처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배상 팔억 만 원을 받을 터이니'''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마음을 크게 먹어 '''십 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 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 올 생각들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할 생각들만 하고 못 되려니와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 >1896년 8월 4일 화요일 - 한글 현대문 ([[독립신문]]) 한국에 알려진 잘못된 [[통념]] 중 하나. [[한국사]], 특히 조선 건국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의 역사를 주로 들먹이며 '수천 년 동안 침공만 당해온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서 이를 또 역으로 해석하여 "한국인은 침략 따윈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엔 어폐가 너무 많다. 그나마 철벽방어를 이룩했으면 모를까, 본토의 일부라도 점령당한 사례를 들먹이면 그저 자신들이 동북아 정통 [[약소국]] 또는 [[호구(유행어)|호구]]라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한국인은 매우 호전적인 [[전투민족]]이었다. 고구려는 중국이 [[오호십육국]]으로 분열된 틈을 타 시도때도 없이 한족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갔고, 정사 삼국지 등의 기록에서는 이를 보고 고구려는 짐승 같은 놈들이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는 방법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결코 한반도를 제패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백제인이나 신라인도 고구려인 못지않은 전투민족이라 앞뒤로 적을 둔 상황인데도, 대부분의 외교를 창칼로만 해결하려 든 민족이었다.] 때문에 중국은 예로부터 한민족이 항상 뒤통수에 칼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했고, 기를 써서 정복하려 들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군대를 데려와도 지칠줄 모르는 저항이 뒤를 이었고, 중국의 한국 정복은 결국 실패로 점철된 역사가 되어버렸다[* 한(漢)족이 한(韓)족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은 단 두 번,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과 당나라의 고구려 정복뿐이었고, 하물며 고구려 정복은 결국 옛 백제와 통일신라까지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한 반쪽짜리 정복이었다. 게다가 당나라 역시도 완전 한족이 아니라,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선비족이다.]. 결국 한국을 정복한 건 한국보다 더한 전투민족이었던 [[몽골 제국]]과 통일된 [[만주족]]이었다. 그마저도 만주족은 자신들에게 내성이 없는 전염병과 한국이 가진 저항의 역사를 무시하지 못하고 직할령 편입은 포기하고 제후국으로 삼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흔히 삼국의 전쟁은 한국사라는 생각에 서로 간의 전쟁은 단순 내전 수준으로 인식해서 삼국의 전쟁 자체를 축소하는 경향이 많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나라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진 남남이다. 그들의 먼 조상이 같은 피에서 갈라져 나왔을 수는 있으나 서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역사가 아니었다.] 이들이 정말 내전이 아니라 정복을 목적으로 한세기도 쉬지않고 치고받고 싸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는 통치력의 한계로 남부의 특히 신라의 영향력만 확보하고 중국으로의 진출이 중심이였으며, [[백제]]는 자신들의 전쟁에 [[왜국]]을 자주 동원했는데, 백제의 침략전쟁 스케일을 보면 최소 이 시절부터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걸 알수있다. 그 대상이 단지 근처의 신라, 고구려 였을 뿐이다. 거기에 일본은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동원되었다.'''[* [[나당연합]]에 멸망한 백제의 잔존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수만 명의 왜국 정규군을 동원한다'''. 하지만 나당연합의 대처로 [[백강 전투|패전하게 되고]], 전투 이후 왜국으로 백제인들이 정착하면서 왜국에 일본이란 국명이 전해지고 일본이 한국에 [[내선일체|개입할 명분]] 역시 제공하게된다.] 신라의 경우 [[삼년산성]] 이라는 정말 요새 건축의 관습과 양심을 팔아먹은 듯한 요새를 짓기도 했으며, [[나당전쟁]]도 물론 당나라가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라가 선제공격해서 일어났고, 관군은 아니지만 신라 [[해적]] [[신라구]]는 [[쓰시마 섬]]과 강성할 때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 [[구마모토]] 지역까지 유린했다. 이러한 한국인의 호전성은 적어도 [[고려]]와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다. 고려는 [[요나라]]가 친하게 지내자고 하자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는 것으로 응수했고'''[* [[만부교 사건]]은 후대에 고려왕이나 조선왕에게도 비판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건]]은 형제의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폄하했지만 형제의 나라라는 건 같이 고구려의 후손을 표방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지 요나라가 보기에 고려와 발해는 기원부터가 다른 생판 남남이었다. 그러니 만부교 사건을 당했을 때는 자신들이 고려해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고려는 이유도 없이 욕을 하고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요나라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자 고려 사신들은 요나라에 파견을 갈 때마다 행패를 부리며 승전국 행세를 했다.[* 참고로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서도 비슷한 짓을 하는 걸로 당대에 유명했는데, [[소동파]] 문서 참고.]. 고려는 [[원나라]]에게 정복당하는 바람에 속령이 되기도 했으나, 일단은 큰 간섭을 받되 왕(고려인과 몽골인의 혼혈이지만)도 세우고 어느 정도 자치를 하면서 힘을 아끼다가 원말명초의 혼란기가 도래하자 [[공민왕]]은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나 또 [[제1차 요동정벌|중국에 칼을 꽂았다.]] 비록 중국의 혼란기가 너무 빠르게 끝나는 바람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외에도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요동을 길게 점유하지는 못했지만, 신생국 [[조선]]도 초기에는 호시탐탐 요동을 노렸다. [[주원장]]이 이런 조선의 태도에 학을 떼며 요동에서 손을 떼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조선이 겁을 먹을 거라 생각했던 주원장의 생각과 달리 [[이성계]]와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은 당장 쳐들어가 명나라를 처부수고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했다[* 이 위기는 다행히 [[이방원]]이 정권을 잡고 계획을 백지화하며 일단락됐다.]. 조선이 여진족을 상대로 마구 전쟁을 벌여 영토를 빼앗은 건 유명한 일이고, 청나라에게 패배하자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한국이 완전히 쇠락해 전투력을 상실했을 때에도 전투종족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현실적으로 외부에 힘을 투사하는 게 불가능한 약소국이었음에도 다른 아시아의 약소국이 자국을 지키는 데에만 전념한 것과 달리 일본처럼 힘을 길러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고, 실제로 청나라가 쇠락해지자 간도로 군대를 보냈다. 대략적인 역사를 종합해 보면, 결과적으로 한국은 자신이 현재 가진 힘과는 관계없이 일단 수틀리면 싸움부터 걸고 보는 전형적인 전투민족이었다. 자신이 더 강할 때는 더 강하니까 싸움을 걸고, 더 약할 때는 상대가 강하다고 으스대는 게 꼴보기 싫다고 싸움을 걸었다(...). [* 전자는 오호십육국으로 약해진 중국을 공략하던 고구려가, 후자는 제3차 요동정벌와 북벌론을 일으킨 조선이 해당된다. 요동정벌과 북벌 모두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실현 직전까지 갔다가 취소된 만큼 정말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있었던 것은 맞다.] 한국인이 정말 평화주의 민족이었으면 진작에 [[한족]]에게 흡수당한 [[만주족]]처럼 됐을테니 살아남아도 단일민족이란 말은 못 꺼낸다. 이미 10세기 무렵에 인구 1억을 찍었던 중국 [[송나라]]도 약한 국방력 때문에 [[요나라]], [[금나라]], [[서하]] 등에 침공만 당하다 무너졌다. 즉,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영토도 광대한 나라라도 침공만 당하다가는 끝내 멸망하고 만다. 현대까지 문화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력이 보장되어야 하며, 전근대 시대에는 자국 방어를 위해서 주변의 약소국을 상대로 예방전쟁이 많았다. [[한반도]]가 지정학상으로 주변 나라의 이민족으로부터의 침입을 당하기에도 적당한 데다가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랬던 건 맞긴 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명분과 분쟁 거리를 제공한 것도 맞다. 비교적 [[원나라]]와 [[청나라]], [[일본]]에 굴복당한 역사가 강조되는건 그쪽 기록이 더 상세하기 때문이고, 지속적인 노출효과 때문에 더 큰일처럼 부각되었을 뿐이기도 하다. 참고로 고려/조선 때도 [[북벌론|중국 쪽으로 침략할 생각이 있었긴 했으나]] 그 동네가 워낙에 세력이 큰 탓에 실현시키진 못하고 사대주의로 바뀌어 조용히 지냈을 뿐이다. 물론 초기 조선은 명나라와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다. 명나라도 그렇게 좋게 보는 편도 아니었고, 이 당시에는 조선이든 명나라든 서로 진짜로 한판 해보려던 시도 역시 존재하고, 시도 수준으로 그친 것도 막상 공격이 시작되면 조선이든 명나라든 둘다 국력이 박살 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덕분에 태조 대에 황실 결혼을 하려던 시도가 있기도 했다. [* 환빠들이나 일부 비뚤어진 민족주의 학자들이 이 때문에 [[고려]]와 [[조선]]을 폄하하며 [[고구려]]를 과도하게 빨아대는 경향이 있으나, 고구려 역시도 중원을 도모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전투병력만 113만, 총 병력 약 300만의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고, [[돌궐]]과 고구려라는 두 나라를 상대로 양면 전선을 펼치고도 국력을 유지했던 위상을 가진 나라다. 다만 [[고구려-수 전쟁]]과 [[고구려-당 전쟁]]으로 [[수나라]]가 망해버리고 [[당나라]]는 수나라 꼴 안 날려고 [[신라]]와 동맹까지 하는 등, 중국 역시 고구려를 중화패권을 위협할수 있는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고구려가 얼마나 큰 위협인지는 '''당대의 중국인들은 고구려 국경과 전선에 배치되는 것을 [[유배]]당한걸로 취급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역시 국력에 한계가 있고, 한반도의 두 국가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만 노리기도 했으며, 결국 [[위나라]]와 전쟁을 하게 된다. 중국이 [[삼국시대(중국)|삼파전]]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강행 한 것, 결과적으로 중화와는 분쟁이 시도때도 없었지만 한반도 전체가 완전히 라고 할만큼 굴복당한적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원나라]]와 [[청나라]]는 민족이나 정부 구성상 중화를 정복한 유목민 문명 이지 중화권 문명이 아니다.] 또한 세종 시대에는 서역의 무슬림과 어쩌다 흘러들어온 민족들을 동화 시킬 정도로 강력한 동화정책이 꽤 잘돌아가는 편이기도 했기에 만일 조선이 근대화를 일찍이 성공시키고 강력한 국가를 갖추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쳐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전혀 장담을 못 한다. 실제로 약해진 청나라를 보고 만주를 합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동서양 막론하고 어떤 국가든 자기가 힘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극단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주변국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조선말-[[대한제국]] 시대 자체도 늦은 근대화와 약한 군사력이라는 현실에 눌려 [[프랑스 제국|프랑스]]와 [[러시아 제국|러시아]]에 줄을 서는 행보를 보였을 뿐, 실상은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여서 이곳 저곳에 외교적 행보를 이어가다 보니 [[프로이센]]에 꽂히기도 했다. [[의화단 운동|열강의 개입]] 당시 러시아가 조선도 청나라에 개입하기를 원하기도 했으며. 청나라의 약체화가 가속되고, 군사적 우위를 달성하자마자 바로 만주로 진출할 생각부터 했다.[* 굳이 [[파시즘]]이 정권을 잡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열강으로써의 지위가 안정화되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항상 주변국을 침략했다. 당시 시대는 '열강으로 불리려면 [[식민지]] [[식민제국|한두 나라 정도는 가지고 있어줘야 하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의 불필요성을 일찍 내다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2세]]가 끊임없이 [[아프리카]]와 [[중동]]을 침략하며 3B정책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는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등의 전통 열강들이 [[베트남 전쟁|베트남]]과 [[알제리 독립 전쟁|알제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인도네시아]]의 독립 전쟁에 하나 둘 무너지면서 세계 패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면서 끝나게 된다. 식민지를 유지할 국력도 없는 데다가, 비교적 식민지가 적었으며 한편 본국이 넓던 미국과 소련은 저들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진영도 겉으로는 독립을 유도했지만, 정작 자국에 충성하거나 자원을 헐값에 얻으려고 유사 식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쿠데타 지원으로 국가 전복부터 주요 인물에 대한 온갖 더러운 공작을 시도하는 대첩보전의 시대가 개막된다.] 현대로 넘어오면 북한은 경제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만들고, 남한은 평소 포방부 소리를 들을만큼 화력에 관심이 많고 처음의 온갖 제약들이 서서히 해제되면서 유사 핵무기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화력 강화에 몰두하고 있다. 애초에 특히나 서유럽 국가들이 인권 문제를 들어 기술적 우위를 약점 잡아 특정 무기를 특정 국가에 판매하는것을 제한하거나 불허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속된 말로 돈만 입금해주면, 미국이 민감해하는 것만 아니면, 적성 국가만 아니면 가성비 좋은 무기를 꺼리낌 없이 판매하는 데서 절대 평화주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반대로 한민족, 한국인의 성향은 호전적 성향 혹은 [[군국주의]] 성향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는 민족적 근본일 만큼 상당히 오래되었고, 근현대에 수난의 역사가 길었던 탓에 그 성향이 더욱 짙어진 상태라 봐도 이상하진 않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인은 군사력 증강을 한다고 하면 찬성하면 했지 비판이나,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계획에 맞춰서 [[대안]]을 [[https://gall.dcinside.com/war/2155687|제시하는 형식 등의 비판들은 있지만]], 그 시도 자체를 [[청주 간첩단 사건|완전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현대 한국인들에겐 "그게 무슨 소리냐"라며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제3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존재, 경직된 정치계, 후술할 남한 사회에 있는 극단적 집단주의의 부작용들, 높은 징집률의 가혹한 [[징병제]]와 [[민주주의]] [[국가]]치고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민통제]][* 헌법상에도 문민통제를 기본으로 정의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과거 [[교련]]의 영향을 받은 교육방식[* 최근엔 많이 희미해졌지만 [[국민학교]] 시절에는 아이들에게도 간단한 제식을 가르쳤었다. 그리고 이것의 영향이 아예 남아있는 부분이 [[조회]], [[학교 수련회]]와 [[해병대 캠프]]이다.],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해당 문서에도 간접적 언급이 있지만, 조금만 정치적으로 틀어지면 [[프로파간다]]가 될 수도 있는 이런 스타일의 프로그램은 방송 역사상 전무후무할 경우다. 오죽하면 '조작 사나이'라는 멸칭이 만들어질까. 거기다 대한민국의 약 99%의 남성들이 군복무를 수행하는 현실에서 이런 되도않는 프로파간다로 현 군대의 문제점을 숨기고 미화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현 국방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증이기도 하다.]의 존재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물론 상당수는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에서 배워온 것들이지만 모든 게 전부 다 일제만의 탓이고 한국인은 아무런 잘못도 과거 한국사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일제 이전의 대한제국부터가 제국주의에 관심을 보였고, 프로이센식 군대에 감화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한 군국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일본 제국의 개입이 없어도 대한제국식 군국주의는 막을수 없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과장하지 않는 서술을 하더라도 "평화적이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꺼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초강대국|국제깡패라는 비아냥을 듣는]] 미국도 비슷한 언급이 있으며, [[평화주의]]가 무조건 진리라는 것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