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프로야구/1992년/신인드래프트 (문단 편집) == 이모저모 == * 당시 투수가 부족했던 삼성은 [[계명대학교|계대]]의 좌완투수 [[김태한]]을 1차 지명자로 선택하면서, [[김태한]]과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동기였던 [[양준혁]]에게 이듬해 1차 지명자리를 약속했다. 당시 대학 최고 타자였던 [[양준혁]]이 2차 지명에 나오게 되자, 2차 지명에서 첫번째 지명하게 된 OB가 [[양준혁]]에게 백지수표까지 제시하며 [[양준혁]]을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양준혁]]은 삼성과의 약속 때문에 상무행을 고집했고, 결국 OB는 [[양준혁]]의 지명을 포기했다. 이처럼 [[양준혁]]의 상무행이 이미 파다하게 퍼진 후라 2차 지명 당일 8개 구단 모두 1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하지 않았는데, 쌍방울이 2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했다. 이에 대해 쌍방울에서는 [[양준혁]]이 상무행을 주장한다고 애초에 지명을 포기하는 것은 프로구단의 태도가 아니지 않느냐며 입단하면 좋지만 입단하지 않더라도 손해볼 건 없다고 했다. * [[양준혁]]의 사례뿐만 아니라 당시 다른 신인들도 계약금을 더 받기 위해 상무 입대를 빌미로 구단과 신경전을 벌였다. ~~돈 안 주면 나 군대간다~~ [[정민태]], [[임창식]], [[임수혁]] 등이 이런 사례였는데 [[임수혁]]은 결국 상무행을 선택했다. [[임수혁]]은 전역을 앞두고 열린 199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이 당시 2차지명의 유효기간은 1년이었기 때문에 기존 지명권은 자연히 소멸되었다. 상무행을 선택한 [[양준혁]]도 마찬가지.] * LG에 9라운드 지명된 [[김정준]]은 [[김성근]] 당시 삼성 감독의 아들이다. 애초에 아버지인 [[김성근]] 감독조차 프로에 갈 실력은 아니었다고 할 정도라서 [[김성근]] 감독을 의식한 '인질'이 아니냐는 세간의 억측이 있었다. * 롯데에 10라운드 지명된 황석호는 1991년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 서울출신 대형 고졸 신인투수를 둘러싼 LG와 OB의 눈치작전 속에서 지명에서 제외된 덕분에 [[조성민]]은 대학 졸업후 아무런 문제 없이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LG의 지명을 받은 임선동은 해외진출을 놓고 LG구단과 법정공방까지 가는 진통 속에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LG 구단과 앙금을 쌓게 된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홍익대로 진학한 [[손경수]]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대학을 2년만에 중퇴하고 OB에 입단하지만 계약금은 경기고 졸업 당시 제시받았던 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 7,800만원이었고 그나마 아버지는 수술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홍익대 측에서 프로아마 협정을 들고 나오면서 태클을 걸어 손경수는 당장 1군 무대에 설 수 없었고, 결국 사생활 문제가 발생하며 1995년에 1군에 오르지 못하고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이후로는 잠시 대전 서구 리틀야구단을 지도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고 2016년에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715#_enliple|관련 기사]] * [[박재홍(야구)|박재홍]]은 이 해의 1차지명을 통해서 영구 지명권을 가지게 된 해태의 입단을 끝끝내 거부하고 결국 1996년에 [[최상덕]]과의 지명권 트레이드라는 형태를 통해서 현대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1996년 봄부터 [[광주아재]]들의 표적이 된다.-- [각주] [[분류:KBO 신인 드래프트]][[분류:한국프로야구/1992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