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글/역사 (문단 편집) == 만든 이는 누구인가? == [youtube(CgGGi_ATrX8)] 과거에는 [[세종대왕]]의 지시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의 실무를 전담하고 세종대왕이 관리, 감독자 역할만 한 뒤 국왕으로서 자기 이름으로 반포한 것처럼 여겨진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한글은 문종을 비롯한 소수의 직계 가족의 도움만 받아 창제했다는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에서 자문을 받기 위해 신하들을 불렀다가 격렬한 반발을 받고 참다 참다 분노한 세종이 반대한 신하들을 전부 의금부에 가두고 [[정창손|한 명]]은 파직시켰을 정도로 당시 기득권층의 반발이 매우 심했었다.[[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811|#]] [[월인석보]]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본]]의 표제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인데, 이 '어제(御製)'라는 표현은 왕이 시를 짓거나 교지를 내리거나 그림에 짧은 칭찬 문구를 남기거나 책을 써서 하사하는 등 '''직접 작성한''' 것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御製이라는 표현은 약 750회 등장한다. 신하가 왕을 가르치는 [[경연]] 자리에서 오히려 왕이 신하를 꾸짖으며 툭하면 책과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공부하라고 보내길 밥먹듯이 한 [[영조]]실록에 '''300회'''가 나온다. 영조만큼 신하들을 구박하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박식했던 [[정조(조선)|정조]]실록에 124회 정도 등장한다. [[연산군]]은 맨날 술만 마시고 시만 읊었던 탓에 82회 등장한다. 즉 어제라는 표현은 몇몇 특이했던 왕만 집중하여 썼으며,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도 고작 9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임금이 직접 만들었든 누굴 시켜서 만들었든 단순한 총괄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직접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상당히 참견을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 그리고 당시의 여러 정황상 [[세종대왕]]이 혼자서'''만''' 만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선결되어야 하는 자료 수집량이 개인이 모으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등의 문제가 있다. 단 그 개인이 한 나라의 왕이니 얘기가 다르기는 하다. 대개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제자 시켜서 자료 수집해 오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주도하면서 신하들에게 자료 수집 등의 보조 업무를 시키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이 '''소수 정예 인원이 참여하는 비공식 계획'''의 '''최일선 실무자이자 관리자'''로서 작업에 주도해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직계 가족들이 관여했을 거라는 것도 세자 문종 한 사람만 직접적인 문헌증거가 남아있고 그 외에는 가정일 뿐 확실한 직접적 증거는 없다. 세종대왕이 아무래도 바쁘기도 하고 참고자료의 양이 워낙 많아서 세종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세조(조선)|세조]], [[안평대군]] 등)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법 높을 뿐이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의 확실한 참여 기록이 없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의도해서 은닉하였더라도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명백한 참여 증거들이 나오기 마련인데(일부러 밝히는 때야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 않았다. 이래서 아직까지도 한글의 제작자에 여러 추측이 나온다. 그 일단이 아래이다. [[수양대군|세조]] 6년 5월 28일 기사에 '''예조에서 《[[훈민정음]]》·《[[동국정운]]》·《[[홍무정운]]》을 문과 초장에서 강할 것 등을 아뢰어 따르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선왕(先王)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洪武正韻)》도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정조 7년 7월 18일 기사에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한 홍양호의 상소문'''이 실려 있는데 이 상소에서도 '''오직 우리 세종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리학|성학(聖學)]]에 잠심(潛心)[* 성리학에 마음을 둠.]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 유학자들이 즐겨야할 기예 6가지. 몸가짐과 마음가짐 올바르게 하는 것(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시민(時敏)은 창경궁의 동궁인 [[창경궁 시민당|시민당]]을 말한다. 시민당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장소로 해석하면 "언문 창제는 [[문종(조선)|세종의 왕세자]]의 공부에 방해만 된다." 정도가 되겠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 시를 쓰거나 서화를 그리는 것을 말한다.]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석고대죄|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 >(중략) > >[[세종(조선)|임금]]이 소(疏)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세자가 국가의 행정을 돌보고 있는데, 어떻게 훈민정음 창제에서 뺄 수 있겠는가]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하였다. >----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 그러나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위와 같이 창제에 상당히 깊이 관여했을 것이 거의 확실한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최만리]]의 상소에서 [[동궁]](東宮, 문종)이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은데도 훈민정음 창제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세종 본인도 문종이 한글 창제에 상당부분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한편,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 서문'''에서 훈민정음은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의 작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세종 '혼자서' 만든 것은 아니고 세자 문종에 한해서는 창제에 상당히 크게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부터 이미 훈민정음의 원리에 능통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한 것이라거나 운회를 정리하는 데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참여한 것을 보면 문종은 크게 관여했고 나머지 2명은 적어도 창제 이후의 검증 작업에는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16_001|실록의 관련 내용 참고]]). [[집현전]] 학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정황상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온전히 비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제 과정에서도 집현전 학자들이 보조 연구원의 형태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도 역할은 어디까지나 [[세종대왕]]이며, 문자 창제라는 진짜 목적은 숨긴 채 음운론 정리 등을 구실로 이리저리 자료를 수집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집현전 학자들은 나중에 훈민정음을 가지고 한자음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조차도 소장파에 국한되었다. 집현전 최선임 상근직인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세종의 역린을 건드려 투옥까지 될 정도로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외에 죽산 안 씨 족보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차녀 [[정의공주]]가 대군들이 풀지 못한 문제의 답변을 잘하여 [[노비]] 수백을 상으로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게 기록된 이유는 [[정의공주]]가 죽산 안 씨 가문으로 출가했기 때문. 족보에 실렸다는 이 내용은 문제가 많다. 상으로 노비 수백을 내릴 정도라면 개국공신, 반정공신 정도는 돼야 받을까 말까 한 비현실성으로 큰 상이다. 왕실의 재산에 타격을 줄 정도다. 이런 큰 상을 받을 정도면 실록에 실리지 않을 수 없으며, [[세종대왕]]의 정치 방식상 이렇게 상을 남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족보는 여러 이유로 과장이나 거짓이 많이 포함됨을 고려하면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고, 정의공주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지라도 후대에 어떤 이유에선지 엄청난 왜곡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