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미상호방위조약 (문단 편집) === 조약 체결에서 [[이승만]]의 역할 === || [[파일:John Poster Dulles Wrestling with Syngman Rhee.png|width=100%]] || || [[프린스턴 대학교|프린스턴]] [[동기]]인 [[국무장관|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덜레스]]와 [[이승만]]은 [[정전 협정(6.25 전쟁)|휴전 협상]]을 앞두고 서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대치 속에서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 오늘날 미국의 국익에서 [[한반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에도 미국이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어차피 당시에 한반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라고 평가하면 조약 체결에 있어 이승만의 역할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고, '미국은 당시에 한반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승만의 노력으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라고 평가하면 이승만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1945-1950) 미국이 한반도에 무리하게 주둔하는 건 무리였고, 전략적으로 한반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던 점도 사실이다. 이하의 내용은 '''냉전 초기, 즉 대략 [[애치슨 라인]]이 제기되기 전후의''' 미국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를 서술한 것으로, 수십년째 이 조약으로 한미일 전체가-이 조약이 없었으면 누리지 못했을 안보적 이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듯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판단이었다. 미국에서 냉전 당시 전면전을 대비함에 있어 [[한반도]]의 중요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M48 패튼|M48]] 전차로 베이징을 밀어보고 싶던 말던 일단 조약체결이 거론되던 시점에는 한반도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던 시점이었다. 전쟁수행시 미국이 기갑 전력으로 38선에 돌파구를 뚫어도 적군 보병이 도보로 금방 다시 몰려와서 메워버리는 수준이었다. 냉전 당시 서유럽 평원에서도 기동을 위해 적어도 100km 이상은 보장되었는데 이보다도 좁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갈려나가는건 보병이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중국 육군과 북한군, 그리고 북중소의 방공군 + 공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이어나가는 건 미국 입장에서도 정말 피하고 싶은 전투다. 심지어 6.25 전쟁 발발 직전에는 한국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음을 미국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남한에 미군 지상군을 주둔시키는 선택지를 극력 반대했다. 만약 중국과 소련이 함께 개입하는 수준의 전면전 발생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거다. 대륙으로의 진격은 커녕 미군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다.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한반도 정세를 논의할때 3차대전 발발시 한반도가 제2의 필리핀 바탄반도[*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좁은 회랑에서 포위 섬멸전을 당한 악몽이 되었던 곳이다.]가 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했다. 따라서 "미국 입장에서 한반도가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중국]]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역을 가장 빠르게 육로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대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반도는 애초에 소련 극동군구 방공군의 작전반경내라 오히려 한반도에서 애먼 병력만 축내느니 중국부터 처리해 나가고 소련 극동군구를 알래스카 쪽에서 묶어둠 으로서 소련이 서유럽에만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방대한 소-중 국경에 병력과 정보자산을 분산하여 배치하는게 미국으로서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냉전 초기부터 역설한 한반도 교두보론은 진주만 폭격 전부터인 1940년대부터 미국으로 하여금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일본의 야욕 그리고 미국에게 있어 한반도의 중요성을 꾸준히 역설해온 이론이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상술한 이유로 이승만이 내세운 한반도 교두보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며,[* 시대가 지날수록 그 시큰둥한 반응이 오히려 힘을 잃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이용한 태평양지역 방위에만 신경을 썼지 제2세계 상대로 확실히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는 무성의했다는 이야기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실제 방위가 필요한 서유럽과 패전후 미국의 영향력 고정을 위한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휴전으로 인해 지속될 불안정한 정세와 대한민국이 지출할 국방에 대한 천문학적 예산 낭비에 대해 차관공급과 병행한 외교적인 달래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일방적인 파기가 가능한 조항이 존재하는 등 여러가지 제약이 많이 걸려있다. [[이승만]]이 1948년 8월에 미국에게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가능성을 물었을 때 미대사였던 무초는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고 답하며 거절했다.[* 이 발언 이후 미국은 1949년 4월 나토조약, 1951년 8월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 동년 9월 미--호주-뉴질랜드 안보조약 등을 체결했다.[[https://2009-2017.state.gov/s/l/treaty/collectivedefense/index.htm|#]] ] 이승만은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상호방위조약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상호방위원조협정', '주한미군사고문단설치협정'같은 큰 실익 없는 협정을 맺어주는게 다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 [[영국]] 및 영연방, 그리고 UN 참전국 전체를 상대로 보란듯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같은 초강수로 미국과 제 1세계로 하여금 일본이 아닌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제 1세계의 최전방임을 각인시켜 지금껏 지속되어온 한미동맹의 주춧돌을 때려박아 넣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는 이승만의 영향이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을 최빈국에서 건실한 국가로 만들어 중국에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거나 중국을 공격할 때 지원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들여야 할 비용은 [[애치슨 라인]]만을 방어하는 비용보다 천문학적으로 높았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작고 산악지형이 국토의 태반인 반면,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해볼정도의 해군력을 지닐 기술과 공업능력이 존재했었으며 한국에 군수물자를 수출하며 재건의 발판을 밟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보다 일본에 투자하고 싶어하는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이승만이 주한미군과 상호방위조약을 못박음으로 산업경제의 패러다임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한국에게 결과는 처참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시에 중국과 소련에게 역공을 가하려면 '한반도 장악이 필수다'는 점은 사실이다. 분명히 미군 지휘부가 간과하고 있거나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다. 남한이 함락당하는걸 원치 않고 일본이 위협받는게 싫어서 6.25 전쟁에 참전 해놓고, 그 이후에 한반도를 미군이 없는 완충지대로만 남겼다면, 한반도는 수시로 전쟁 위협이 시달려야 했거나, [[우크라이나 전쟁|전쟁에 돌입해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 이상적인 완충지대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외교를 '''대나무 외교'''(대나무처럼 이리저리 휘되 꺾이지 않는다는 뜻)로 칭하며 완충지대 외교를 펼쳤던 태국조차도, 냉전이 표면화된 이후부터는 (주변국들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진영에 가담해야만 했다.] 추가적으로 6.25 전쟁 당시 미국 국내 여론은 매우 안좋았다. [[해리 S.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30일 미군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했다. 당시 미국인의 78%는 트루먼의 군사 지원 결정에 찬성했고 15%는 반대했다. 이듬해에는 대중의 지지가 줄어들었고 전쟁의 사건에 따라 변동했다. 미국의 외교사를 봐도 알겠지만, 동맹국들의 지원에 대해 여론/국내정치에 따라 급변하는 경향이 심했다. 아이젠하워가 1953년 대통령이 될 당시 주요공약이 '한국전쟁 중단'이었다. 그당시 미국 입장에서 어떤 모양이든 휴전이 절박했고, 이를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도 생각하고 있었다.[[https://www.eisenhowerlibrary.gov/research/online-documents/korean-war|#]]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20030204b_2.gif|width=100%]]}}} || 이에 더해 미국 국민은 대체로 6.25 전쟁을 3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의 존립을 위해서 휴전이 최대한 빨리 와야하는 거였다. 미국 입장에서 휴전이 얼마나 절박한지 보여주는 바다.[[https://news.gallup.com/poll/7741/gallup-brain-americans-korean-war.aspx|#]]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20030204b_1.gif|width=100%]]}}} || 아이젠하워는 구체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상호방위조약을 이용해 미국을 또다른 전쟁으로 끌고 가려는 꼼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resource/modern-korean-history-portal/us-korea-military-alliance|#]] 추가적으로 대한민국의 불안정한 국내정치상황은 동맹 파트너로 큰 하자였다. 아이젠하워는 또한 상호방위조약이 한반도에 대한 기존의 유엔 노력을 약화시키고 유엔사령부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러한 미국의 마음을 돌린건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줄곧 아시아 국가들의 반공연맹을 주창해왔는데, [[아이젠하워]]는 이를 아시아판 나토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휴전협정 서명일인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시켰다. 이에 미국은 한국이 다시는 휴전회담을 흔들지 않는 조건으로 상호방위조약에 동의했다.[* Despite Rhee’s open hostility against a cease-fire, the US successfully came to terms with the PRC and DPRK on an Armistice agreement that would end the war in 1953. As a means to disrupt this agreement, Rhee ordered the release of anti-communist North Korean POWs on June 18, 1953, the same day that North Korean, Chinese, and UN forces planned on signing the Armistice. In response, the US offered Rhee treaty negotiations if he agreed to no longer disturb cease-fire negotiations.] 미국의 휴전에 대한 절박함을 역으로 이용한 결과다. 냉전, 그리고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든 패배했든 군대를 철수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군사파견은 운영비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군의 철수 후 동맹국들은 대체로 살아남지 못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의 처참한 실패, 1975년 남베트남과 라오스의 몰락, 그리고 최근 이라크/아프간 철군 등에서 미국이 처음 군사지원을 하면서 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남베트남과 라오스는 사실상 유기한 것에 가깝긴 하고, 이라크/아프간 같은 경우는 미국 내에서의 여론이 파탄나기도 하였고, 또한 명분 및 실익마저 사라졌기에 철수한 것이다.] 한반도는 일본의 최인접국이다. 최악의 경우 이러한 최인접국이 적화통일 된 뒤에 일본을 겨누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랬다면 일본은 지금의 남한 못지 않은 안보위협이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 북한이 통일한 한반도 영해와 중국 영해, 그리고 소련의 영해까지 삼면으로 대치해야 했을 것이다. 즉, 애치슨 라인은 단기적인 가성비 측면에 좀 더 의미를 둔 것이고, 장기적인 군사적 측면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 그 어느쪽에도 이렇다할 유리한 환경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실책이자 실패한 수 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이 초강수를 둔 것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에게도 이득이 된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미 수십년째 증명이 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