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미상호방위조약 (문단 편집) == 체결 과정 == [[6.25 전쟁]]이 발발 후 3년을 채워 가는 상황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더글러스 맥아더]]가 경질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본토에서는 '무의미한 전쟁, 질질 끌지 말고 휴전협정 맺고 빨리 끝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7일 당시 미국 브릭스 대사와의 회동에서 휴전 후에도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해외에 간섭을 하지 말자는 고립주의 방향으로 흘러가던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제2의 필리핀 바탄반도가 될 거라며 상호방위조약을 거의 기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방위조약 등의 방어수단 없이 휴전이 이루어지면 언제든 다시 북한이 침략해올 것을 우려한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독단적으로 일으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 조치에 크게 놀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약속 위반자'라고 비난했고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의안이 나오기도 했고, 비밀리에 [[에버레디 계획]]을 구체화하여 실행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이승만의 이러한 초강수에 휘둘리고 있었으며 어느새 이승만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9일자 소비에트 뉴스는 당시 미국이 이승만 앞에서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며 휘둘리던 상황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이승만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이승만은 부산 한 모퉁이의 미군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이승만은 너무도 강대, 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국 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휴전협상 주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작권을 환수하고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한다는 한반도 교두보론을 내세우며 상호방위조약에 비관적이었던 미국 정가를 설득하였다. 결국 미국은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이후 같은 해 8월 3일 미국과 협상을 시작하였고 이승만은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치회담이 결렬될 경우 무력통일을 추진하겠다고 협박하며 압박을 이어나갔다. 양국간의 협상 끝에 8월 8일 조약의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들은 많은 혜택을 볼 것이다"면서 크게 기뻐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델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조인하였으나, 이후 삽입조항에 대한 양국의 의견차가 심하여 시간을 끌다가 1년 후인 1954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6FBZW_Azef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