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민족 (문단 편집) == 역사적 원류 == 지금은 통합된 개념으로서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쓰이지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 갈래([[삼한]], [[예맥]], [[부여]])의 원류"[* [[부여]]는 [[예맥]]을 구성하는 두 계통의 집단들 중에서 '예족'과 연관이 깊지만, 일단은 별개로 보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한(韓)족, 예족, 맥족, 부여족, 탐라족, 우산족 등등이 있다.] 물론 이 외에도 유입된 사람들이 있었을 테지만, 전체적인 비중으로 따지면 극소수에 그쳤고 대체적으로 이 계통의 집단([[예맥]]과 [[삼한|한(韓)]])이 인구면에서 다수를 차지하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다. [[예맥|맥족]] 계통의 [[고구려]]는 [[예맥|예족]]인 [[옥저]]와 [[동예]] 그리고 [[부여]] 등을 복속시키고 민족적 동화를 이루어 [[예맥|고구려족]]을 형성했다. 이후 역사의 진행에 따라 남방의 백제에 의해 마한이 병합됐으며, 진한에서 기원한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후 대동강 일대 이남 지역에서 세 종족의 융합이 진행됐다.[* 다만 언어적인 융합은 이보다 훨씬 전에 진행된것으로 보인다. 양서같은 중국 사서기록이나 일본서기에 남겨진 기록들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통한다고 되어있으며 백제와 신라와도 언어가 통한다고 나와있다.] 이후 늦어도 [[고려]] 원간섭기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형성이 완성된것으로 보인다. 한편 압록강 이북에 살던 예맥인들은 발해의 주 구성원이였지만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피지배층으로 전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부흥운동이 일어난것을 보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탄압과 이주등으로 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탄압에도 조선 초기까지 랴오닝 반도 일대에 상당수 살고 있었는데, 끝내 요동이 명나라에 복속되면서 이들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한족에 동화되었고 이후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만주족에 동화되었으며 현재는 만주족 대부분이 한족에 거의 동화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다시 한족에 동화되었다. >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삼한|한인(韓人)]]과 [[예맥|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부여와 동예는 예족,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의 맥족, 한반도 중남부는 한인에 해당된다.] [[삼한|한(韓)족]]과 [[예맥|예맥(濊貊)족]]은 [[광개토대왕릉비]]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오래 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섞여 살아온 여러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그 명분을 확립하기 위하여 [[삼한일통]]을 표방했으며, '''후대의 국가들은 이를 계승해 현재는 단일민족국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