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불관계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었기에,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가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호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조계지라는 점을 이유로 [[일본제국 경찰]]을 막아주거나 임정에게 위험한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해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1920년대~1930년대의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식민제국|식민지 문제가 걸려 있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아무리 잘해야 [[블라디미르 레닌|레닌]]과 비슷한 경우로 취급한 것뿐이다. * 최근 [[폴란드 망명 정부]]와 [[자유 프랑스]]가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1798.html|대한민국 임시정부를]] [[https://www.mk.co.kr/opinion/contributors/view/2020/08/841087/|승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확실하게 뒷받침할 [[물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여부에 대하여 최신 연구 결과인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721938|임정, 거절당한 정부]]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1945년 6월 8일 [[http://db.history.go.kr/id/ij_043_0040_02670|대한민국]] [[http://db.history.go.kr/id/frus_001r_0010_0110|임시정부에]] [[http://db.history.go.kr/id/ij_043_0040_02680|대하여]]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90|주권의]] [[http://db.history.go.kr/id/ij_041_0020_01390|승인을]] [[http://db.history.go.kr/id/ij_041_0020_01400|거부하는]] [[성명#s-2]]을 발표했으며, [[영국]] [[외무부]]는 1943년 12월에 [[영국 하원|영국 중앙의회의 서민원에서]] [[클레멘트 애틀리]] [[부총리]]와 [[https://en.wikipedia.org/wiki/Ian_Hannah|이언 해너]] 의원과 [[https://en.wikipedia.org/wiki/Neil_Maclean|닐 매클레인]] 의원의 [[http://db.history.go.kr/id/ij_024_0020_00020_0070|흥미로운 문답]], 중화민국 주재 영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1944년 5월 25일에 영국 외무부로 발송한 [[http://db.history.go.kr/id/ij_024_0020_00030_0040|비망록]](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아놀드 토인비]]와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Webster_(historian)|찰스 웹스터]]가 자문하여 1944년 12월 20일에 [[제의]]한 [[http://db.history.go.kr/id/ij_024_0020_00030_0130|비망록]](한국의 장래 Ⅰ)과 1945년 1월 31일에 [[토의]]한 [[http://db.history.go.kr/id/ij_024_0020_00040_0060|보고서]](한국의 독립능력)와 1945년 7월 24일에 [[결의]]한 [[http://db.history.go.kr/id/ij_024_0020_00040_0110|보고서]](한국의 장래 Ⅱ)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믿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총칼로 [[신탁통치]]가 해답이라는 최종 방침을 확정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010|프랑스 본토의 탈환에 성공한]]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020|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030|프랑스 외무부의]]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10|고위급 관료들(장차관 및 국과장)과]]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30|3개국(중국, 미국, 소련)에 주재한]]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70|프랑스 대사관들의]]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80|매우 비관적인]] [[http://db.history.go.kr/id/ij_023_0050_00190|정보통신 문답]] 및 [[소련 해군]]의 [[해병대]] [[장교]]로 참전한 [[정상진]]의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0708100063|회고담]]을 바탕으로 [[발트 3국 점령|발트 3국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철저하게 짓밟겠다는 의향을 드러냈고,[* [[청진 상륙 작전]] 직후 소련군의 정치공작,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195423/1|사회단체를 결성한 죄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연해주]]의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304010020921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4-01&officeId=00020&pageNo=13&printNo=18921&publishType=00020|무죄로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온]]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5/2009030500083.html|한교석]]([[한양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기자회견]],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주모자들을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압송한 사례를 깊이 다룬 기광서([[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논문(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은 [[스메르시]]와 [[GRU]]와 [[NKVD]]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끔살]]하거나 [[유배]]하는 비상계획의 존재를 암시한다.] 제3의 친공세력([[김일성]], [[박헌영]], [[현준혁]], [[김용범(1902)|김용범]], [[김원봉]]으로 추정)을 [[간택]]했다. [[자유 프랑스]]는 고심 끝에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의향을 수용하기로 결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끈질긴 요구를 이리저리 회피했다. 마찬가지로 폴란드 망명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뭔가를 했다는 [[공문서]]의 기록은 아직까지 없으며, 1990년대 이후의 폴란드인사들 및 예전에 은퇴한 폴란드 망명 정부의 관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한국-폴란드 관계]]를 명목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발언]]이 없었다는 것부터가 무엇을 뜻하겠는가? 지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나라들은 딱 2곳([[2차 호법운동|중화민국 광동정부]]와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뿐이었고, [[영풍함 사건|광동정부는 천중밍의 반란으로 붕괴했으며,]] [[스기하라 지우네|리투아니아는 일본 제국과 수교했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참고로 [[이스라엘 건국전쟁]] 직전에 이스라엘 진영이 이슈브([[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유대교도]] [[자치정부]])를 개조하여 창립한 [[https://en.wikipedia.org/wiki/Provisional_government_of_Israel|이스라엘 임시정부]]를 [[https://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recognition_of_Israel|1948년 5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승인한 나라들은]] 무려 25개국에 이르렀지만, 그 동안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의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들은 [[미국]], [[영국]], [[중화민국]]이 전부였다는 점은 1940년대의 시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나라들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뜻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